‘하느님은 창조주’란 정의는 신(神) 존재의 주도적 성격을 드러낸다. 창조는 신 존재를 제외한 모든 존재가 피조성(被造性)을 전제로 존재한다는 뜻이다. 다른 존재에 의거해 존재하기 시작하는 창조물은 자신의 근거를 밖에 둔다. 신 존재와 창조된 존재의 경계는 존재의 자존성 여부에 달려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렇다면 피조물 존재의 의타성(依他性)과 달리 신은 스스로 처음부터 존재하는가?
신 존재의 증명에 관한 질문과 대답은 리치가 살았던 시기의 유럽 상황과 관련이 있다. 중세(中世)를 앞서는 고대(古代)교회는 그리스도와 하느님의 존재를 이해하는데 관심을 집중했다. 그리스도는 누구이신지(참 하느님과 참 인간), 하느님의 삼위(성부와 성자와 성령)가 어떻게 구별되는지 깊은 숙고와 논쟁을 거쳤다. 이 문제가 어느 정도 정리된 시점에서 유럽의 중세가 시작됐고, 중세 말 종교개혁과 근대시기를 맞았다. 리치가 교육 받은 신학은 중세의 정점에서 종교개혁을 맞은 시기의 신학사조와 맞물린다. 그가 살았던 시기에 지배적인 신학사조는 스콜라주의(대략 1200~1500년)였으며, 다른 한편에서는 인문주의가 진행되고 있었다. 근대 시기가 시작되기 전 중세는 학문의 발전을 지속시킬 ‘대학’이 유럽 전역에 생겨나면서 인문주의의 발흥을 준비하던 시기이기도 했다.
그렇다면 리치에게 익숙한 당시의 신학사조는 어떠했을까? 신 존재 증명이라는 주제와 관련해서 우리는 여러 명의 신학자들을 거명할 수 있다. 캔터베리의 안셀무스(1033~1109), 토마스 아퀴나스(1225~1274), 둔스 스코투스(1265~1308), 오캄의 윌리엄(1285~1347) 등 이들은 모두 당대를 대표하는 신학자들이었다. 이들 중에서 특히 중세 이후, 제한적인 의미에서 가톨릭교회에 가장 큰 영향력을 끼친 인물은 토마스 아퀴나스이다. 토마스는 신학교과서로도 불리는 「신학대전」(Summa Theologiae)의 첫 권 두 번째 질문(Q2)에서 신 존재 증명을 시도한다. 그렇다면 토마스 아퀴나스는 여기서 그리스도교의 하느님을 어떻게 소개하려고 했을까.
무엇보다도 「천주실의」가 창조계의 질서를 하느님 존재의 증명을 위한 전제이며 배경으로 이해하듯, 이 전제에서 출발하는 토마스는 신 존재 증명을 ‘다섯 가지 방법 혹은 길’ (quinque viis)로 제시한다. 첫째는 운동과 변화의 증명으로, 둘째는 상이한 원인들의 관계, 즉 인과 개념으로, 셋째는 우연한 존재자들이 있음으로, 넷째는 상이한 존재들의 단계와 인간의 가치체계에서, 다섯째는 목적론적 증명 자체로 하느님 존재를 증명한다. 사실 이러한 증명은 자연계, 곧 창조계에서 발생하는 인간의 체험을 생각하지 않으면 제시될 수 없다. 이를 바탕으로 자연(창조계)의 최종 단계를 혹은 질서의 최종 근거를 하느님과 동일시한다. 다시 말하면, 인간의 일상 체험에서 출발해 이성적 추리의 결론으로 마감하는 것이다. 과연 이런 증명은 우리의 하느님 체험을 일상에서 충분히 설명할 수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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