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애하는 형제 자매 여러분,
만물이 소생하는 새봄과 함께 부활대축일을 맞이하였습니다. 진심으로 부활하신 주님의 은총과 평화가 여러분 모두에게 가득하기를 빕니다.
구원과 희망의 빛
우리를 위하여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신 그리스도는 말씀하신 대로 3일 만에 부활하셨습니다. 하느님 아버지는 당신의 뜻에 순종하여 세상 모든 이의 구원을 위해 사람이 되어 오시고, 십자가에 죽기까지 하신 예수님을 성령으로 부활하시게 하셨습니다. 그리하여 우리 모두를 죄에서 구하시고 죽음에서 살리는 생명의 주님이 되게 하셨습니다. 이것은 참으로 말할 수 없이 큰 기쁜 소식이 아닐 수 없습니다.
아담의 범죄 이래 죄와 악으로 가득찬 이 세상, 그 결과 모두가 죽음의 운명과 그 질고를 면할 수 없는 이 세상, 절망과 암흑의 땅에 구원과 희망의 빛이 새벽 햇살처럼 환히 동터온 것입니다.
진실로 사도 바울로의 증언대로 『죄가 많은 곳에는 은총도 풍성하게 내렸습니다』(로마 5,20). 그리스도의 부활로써 인간의 종말은 결코 죽음이 아니요 영원한 생명, 불멸의 생명입니다. 우리 모두도 그리스도를 부활하게 하신 같은 성령으로 죽음에서 영생으로 부활할 것이기 때문입니다(로마 8,11 참조). 이리하여 하느님과 같이 그 영광 속에 영원히 사는 것이 모든 인간의 소명입니다. 여기에 인간 존엄성의 가장 숭고한 이유가 있습니다(사목헌장 19참조).
우리는 2천년 대희년을 앞두고 성령께 봉헌된 이 해에 우리도 성령의 인도하심에 따라서 살며 성령께서 우리 안에 부활 신앙을 확고히 심어 주시고, 우리로 하여금 부활하신 그리스도께서 우리 안에 현존하심을 깨닫게 하여 주시도록 간절히 빌어야 하겠습니다.
『그리스도께서 다시 살아나지 않으셨다면 우리가 전한 것도 헛된 것이요 여러분의 믿음도 헛된 것일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1고린 15,14).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시지 않으시고 죽음으로 끝나고 말았다면 그가 가르친 모든 말씀, 복음도 헛되고, 우리 인생은 구원의 희망이 없고 부조리와 모순 뿐이며, 사람이 진리와 정의를 따라 살 필요도 없고, 윤리도덕 등 모든 가치관이 쓸모없게 될 것입니다. 마침내 그 종말은 멸망뿐일 것입니다. 세상과 역사는 그리스도를 못 박아 죽인 그 미움과 폭력과 거짓 속에 끝없이 공전(空轉)하는 허무일 뿐일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이런 모순된 인생과 종말을 받아들일 수 있습니까? 없습니다. 그것은 너무나 도리에 어긋납니다. 모든 인간이 마음속 깊은 곳에서부터 찾고 있는 진리와 정의, 사랑과 행복, 참 생명에 대한 배반입니다. 우리는 누구도 이런 배반을 용납할 수 없습니다. 이렇게 볼 때 그리스도께서 죄와 죽음을 쳐 이기고 다시 살아나심으로써 우리 모두도 죄의 용서와 죽음에서 다시 살아나는 부활의 은혜를 입게 되었다는 것은 말할 수 없이 큰 기쁜 소식이 아닐 수 없습니다. 정녕 세상에 이보다 더 기쁘고 복된 소식은 없습니다.
부활은 생명의 태양
부활은 진정 죽음의 어둠에 잠긴 지평에 떠오른 생명의 태양입니다. 거짓을 쳐 이긴 진리의 승리요 미움을 쳐 이긴 진리의 승리요 미움을 쳐 이긴 사랑의 승리입니다. 부활생명의 빛이 어둠에 잠긴 인생과 역사를 환히 밝히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로써 인생도 역사도 세상 모든 것이 의미를 얻고 다시 살아나게 되었습니다. 진실로 우리는「알렐루야」의 기쁜 노래를 드높이 부르지 않을 수 없습니다.『이 날은 주께서 마련하신 날, 이날을 기뻐하자, 춤들을 추자』하며 기쁨에 용약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부활은 신앙의 본질
부활은 참으로 그리스도교 신앙의 본질입니다. 그리스도교 신자란 바로 부활을 믿는 사람입니다. 부활신앙을 굳게 간직하고 살 때 우리에게는 죽음이 두렵지 않습니다. 절망이 있을 수 없습니다.『죽음이 죽음이 아니요 새로운 삶으로 옮아감』이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와 같이 반드시 부활한다는 이 믿음은 우리로 하여금 어떤 처지에서도 실망하지 않게 하는 희망 그 자체입니다.
아무리 현실이 어둡고 비참할지라도 ? 하늘을 덮은 먹구름 뒤에는 태양이 건재함을 믿듯 ? 우리의 구원이요 생명이신 그리스도께서 모든 고통과 시련, 어둠과 절망적 상황 속에서도 우리와 함께 계시다는 것을 믿고 있기 때문입니다.
부활은 참 평화
부활은 참으로 평화입니다. 모든 근심 걱정이나 두려움을 없애고 오직 하느님의 자비가 우리의 모든 죄를 용서하고 그 사랑만이 우리를 감싸는 평화입니다. 그 때문에 부활하신 주님은 제자들에게 나타나셨을 때『너희에게 평화가 있기를』하고 인사하셨습니다(요한 20,19).
이제 우리는 이 주님의 부활을 확고히 믿고 이를 온 세상 모든 이에게 전하여야 하겠습니다. 부활하신 주님이 우리 안에 살아계심을 증거해야 하겠습니다. 그리스도를 알리는 가장 힘 있는 증거는 이 그리스도를 우리가 따르는 삶, 닮는 삶을 사는 것입니다. 그것은 곧 주님이 죽기까지 우리를 사랑하신 그 사랑을 실천하는 것입니다.
복음에 보면 예수님은 모든 인간의 종이 되시어 모든 인간을 사랑하고 봉사하셨습니다. 그 중에서도 죄인을 비롯한 가난하고 소외되고 병들고 고통 받는 사람, 실망과 좌절에 빠진 사람을 더욱 깊이 사랑하셨습니다.
이 사랑이 오늘 우리에게 가장 요구됩니다.
특히 이른바 IMF 시대에 우리 주변에는 가난에 시달리는 이들이 많습니다. 실직과 경제적 파탄으로 고통을 겪는 이들이 날로 늘어나고 있습니다. 동시에 북녘 땅에서는 이미 잘 아시는 바대로 식량난이 심각합니다. 많은 이가 - 특히 어린이, 노약자들이 - 굶주림으로 죽어가고 있습니다. 남에서나 북에서나 이 고통에 놓인 이들은 바로 우리와 한 핏줄입니다. 동포요 형제입니다. 이들의 고통에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와 신자인 우리들은 무관심할 수 없습니다.
우리는 예수님께서 지니셨던 그 마음으로(필립 2,5) 그들과 고통을 나눌 줄 알아야 하고 가진 것을 내놓음으로써 그들의 고통을 덜어주는데 최선을 다해야 합니다.
이런 사랑의 실천은 사랑의 주이신 예수님,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시어 우리 안에 사심을 가장 힘 있게 증거하는 표시가 되고 동시에 참으로 나라를 살리고 분단의 벽을 헐고 겨레의 통일을 이룩하는 길이 될 것입니다.
1998년 부활대축일
천주교 서울대교구장
추기경 김수환
가장 많이 본 기사
기획연재물
- 길 위의 목자 양업, 다시 부치는 편지최양업 신부가 생전에 쓴 각종 서한을 중심으로 그가 길 위에서 만난 사람들과 사목 현장에서 겪은 사건들과 관련 성지를 돌아본다.
- 다시 돌아가도 이 길을한국교회 원로 주교들이 풀어가는 삶과 신앙 이야기
- 김도현 신부의 과학으로 하느님 알기양자물리학, 빅뱅 우주론, 네트워크 과학 등 현대 과학의 핵심 내용을 적용해 신앙을 이야기.
- 정희완 신부의 신학서원어렵게만 느껴지는 신학을 가톨릭문화와 신학연구소 소장 정희완 신부가 쉽게 풀이
- 우리 곁의 교회 박물관 산책서울대교구 성미술 담당 정웅모 에밀리오 신부가 전국 각 교구의 박물관을 직접 찾아가 깊이 잇는 글과 다양한 사진으로 전하는 이야기
- 전례와 상식으로 풀어보는 교회음악성 베네딕도 수도회 왜관수도원의 교회음악 전문가 이장규 아타나시오 신부와 교회음악의 세계로 들어가 봅니다.
- 홍성남 신부의 톡 쏘는 영성명쾌하고 논리적인 글을 통해 올바른 신앙생활에 도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