간단하게나마 사물의 존재 이유를 토대로 삶의 영역에서 하느님 체험의 의미를 곱씹어 보자. 토마스에 따르면, 간접적 하느님 체험을 가능하게 하는 창조계는 하느님과 인간을 매개하는 중재 역할을 한다. 인간은 독창적으로 의미를 만들 수 있는 존재가 아니다. 현실에서 주어진 사건에 부딪쳐 의미와 무의미를 식별하고 희망과 절망을 경험한다. 의미와 무의미를 구별하는 능력은 궁극적으로 하느님 존재의 체험까지 확장되지만, 인간은 중재된 사물과 이웃의 만남 속에서 현재적으로 삶의 의미를 결정한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자연철학에 근거한 토마스의 말대로 신(神)이 모든 변화와 운동의 최종 원인으로 이해된다면, 신은 변화를 거스르는 존재일 수밖에 없다. 최종적 원인으로 인식되는 신은 직접적으로 체험할 수 있는 존재가 아니기 때문이다. 게다가 신은 늘 사물과 인간의 만남을 중재로 간접적 인식만을 허용하는 존재이다. 이렇게 이해할 때, 신은 (창조의) 대상과 엄격하게 분리돼 있으므로 창조의 결과로 더 얻거나 잃어버릴 수 있는 게 하나도 없다.
이런 관점에서 창조계 안에서 초월적 체험은 직접적으로 하느님 체험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하느님은 인간 존재와 관계없이 존재하며, 인간에게 하느님 인식과 체험은 어쩔 수 없이 간접적일 수밖에 없다. 따라서 토마스 신학은 부정신학(否定神學)을 내포한다고 볼 수 있는 것이다. 부정신학은 신적(神的)이 아닌 것을 하나씩 걷어냄으로써 신적 본질에 다가갈 수 있다고 주장한다. 토마스의 하느님 존재는 이렇게 모순(矛盾)처럼 보일 수 있다. 역사에 개입해 오시는 하느님이 역사를 거스르는 존재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토마스적 하느님 이해를 넘어서 역사적 실존의 하느님을 더 분명히 해석하기 위해서는 많은 세월이 필요했다.
토마스는 하느님의 내재성(內在性)과 초월성(超越性)의 양면성을 주장하면서 역설적 진술을 감행한다. 하느님은 인간보다 더 내재적이고, 인간이 생각할 수 있는 것보다 더 초월적이다. 달리 말하면, 하느님은 절대적으로 창조계에 내재하면서 창조계를 초월(超越)한다. 하느님이 만물에 내재하기 때문에 창조주와 피조물의 유사성을 언급할 수 있다면, 만물을 초월해 존재하는 까닭에 그 차이는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무한하다. 교회는 토마스 출생 이전에 이미 ‘창조주와 피조물 사이에 더 큰 비유사성이 고수되지 않고서는 이 양자 사이의 유사성은 확인될 수 없다(제4차 라테란 공의회, 1215년)’고 선언했다.
그래서 창조계 안에서 신적이라 발설되는 순간 그것은 더 이상 신적 체험을 참으로 진술한 것이 되지 못한다. 오직 한 분 하느님의 존재는 창조계에서 비견될 어떤 비유로도 직접적으로 표현되지 않는다. 그분은 유일하신 그리스도교의 하느님을 결정적으로 표현하고 지지하는 간접적 개념으로만 가능하다. 리치는 이런 관점에서 하느님을 ‘사물의 보편적 본래의 근원(物之公本主)’ 혹은 ‘만물의 모든 덕을 갖추고 있는(備有衆物德性)’ 존재, ‘보편적 지존하신 존재(公尊者)’로 묘사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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