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전쟁을 통해 우리는 분단의 아픔과 교회의 박해, 성모신심과 순교신심으로 다시 일어나는 의지와 신념을 배웠다. 한국전쟁은 이 외에도 우리에게 또 한 가지 숙제를 남겼다. 포화 속에서 교회를 지키다 목숨을 바친 현대 순교자들의 시복시성이다.
■ 이름 모를 한국전쟁 순교자들
가톨릭대사전에서 밝힌 ‘전쟁 전후 북한군에 체포된 성직자와 수도자, 신학생’은 덕원·함흥 79, 평양 17, 서울 31, 춘천 8, 대전 10, 광주 5명으로 150명이다. 이 가운데 한국인은 52명으로 150명이라는 총계의 약 1/3가량을 채우고 있다.
하지만 ‘전쟁’이라는 당시의 특수상황 때문에 집계에 대한 어려움이 있을 뿐이지 한국전쟁으로 인한 순교자는 그 수가 더 많을 것이라는 추측이 대부분이다.
차기진 박사(양업교회사연구소 소장)는 1994년 월간 ‘사목’에서 “마지막 시기에 이뤄진 박해사에 대하여는 귀순자들의 일부 증언을 제외하고는 자세한 내용을 거의 알 길이 없으며, 제2의 순교사를 파악하는데 도움이 되는 북한의 자료를 구하는 것도 거의 불가능”이라고 밝힌바 있다.
북한교회가 ‘침묵의 교회’로 변해가는 과정 가운데 소련정과 미군정이 각각 들어선 당시 즉, 1945년부터 전쟁 전까지의 상황은 남한으로 건너온 피란민들에 의해 미뤄 짐작해볼 수 있다.
그러나 한국전쟁이 발발한 1950년 6월 25일 이후와 휴전 이후의 피해자들은 ‘죽음의 행진’을 걸었던 성직자와 수도자 외에 많은 사례를 수집하기 힘들고, 수집을 했다 하더라도 ‘행방불명’ 상태가 많으며, 북한교회의 순교상황은 더군다나 알 수 없다.
실제로 1950년 10월 북한공산군들은 각 처에 수감돼 있던 한국인 성직자·수도자들을 살해하기 시작했는데, 김봉식·유재옥·이광재 신부들 외에 황해도의 서기창 신부, 양덕환 신부, 전덕표 신부 등이 피살됐다.
샬트르 성 바오로 수녀회의 김 마리안나 수녀와 김 안젤라 수녀 등도 매화동에서 공산당에게 학살됐는데, 영원한 도움의 성모 수녀회 원장인 장정온 수녀와 서 요셉피나 수녀는 공산군에게 끌려간 뒤 ‘행방불명’돼 이후의 소재를 알 수 없는 것이다.
차기진 박사는 “이미 연길에서 희생된 사람들과 행방불명된 사람들, 잘 알려지지 않은 평신도 희생자들을 더한다면 제2의 박해기 때 희생된 천주교인 수는 훨씬 많아질 것”이라며 “어느 증언에서는 남한에서 끌려가 죽음의 행진에 참여한 이들의 수가 100여 명이 됐다고도 한다”고 말했다.
■ 현대순교자들의 의미와 교회의 노력
발굴에 많은 어려움을 안고 있으며 앞으로의 연구가 더욱 필요한 한국전쟁 순교자들은 우리나라의 순교 명맥을 잇고 있다는 점에서 의미 있다. 박해의 칼날 아래서도 굴하지 않던 신앙선조들을 따라 북한공산군 앞에서 ‘내가 천주교 신부요, 수녀요’라고 당당히 밝혔던 한국전쟁 순교자들이기 때문이다.
한국전쟁이 발발한 당시에도 한국에서 전통적으로 내려오는 이러한 순교신심은 살아남은 성직자와 평신도뿐 아니라 순교자들에게도 도움이 됐다. 전쟁 당시 샬트르 성 바오로 수녀회 관구장이었던 베아트릭스 수녀는 공산군에게 잡혀 ‘죽음의 행진’ 대열에 속해가고 있을 때, 쉽게 걷기 위해 모두들 가지고 있던 물건을 버려야 했는데도 주머니 묵주와 주머니 칼, ‘사랑하는 한국 순교자들의 유해’는 지니고 갔다고 전해진다.
한국전쟁 순교자들에 대한 연구가 점진적으로 진행돼가고 있다는 점도 희망적이다. 지난해 12월 성 베네딕토 왜관수도원에서 ‘신상원·김치호와 동료순교자 38위 시복시성을 위한 예비심사 법정’이 열려 한국전쟁 순교자 첫 시복재판이 진행됐으며, 현재 시복시성주교특별위원회(위원장 박정일 주교)도 2009년 주교회의 춘계 정기총회 결정사항에 따라 ‘한국교회의 근현대 신앙의 증인’에 대한 시복조사를 맡고 있다. 서울대교구에서도 시복시성준비위원회(위원장 염수정 주교)를 발족, 순교자들의 시복시성을 준비하고 있다.
한국교회의 움직임도 중요하지만, 한국전쟁 순교자들을 발굴하고 시복시성 대상으로 올리기 위해서 해야 할 가장 중요한 일은 ‘기도’다. 기도는 신앙선조가 시복시성 되도록 하는 첫 걸음이자 한국전쟁이 남긴 가장 큰 숙제이기 때문이다.
2008년 박정일 주교는 순교자성월 특강에서 “일제 강점기, 공산치하, 특히 한국전쟁 시 납치 학살된 순교자들에 대한 조사와 정리도 시급하다”며 “‘우리는 썩지 않는 화관을 얻으려고 하는 것(1고린토 9, 25)’이라는 말씀처럼 신자들이 순교영성의 전파자가 돼 생명의 화관을 얻기를 바란다”고 당부했다.
[한국전쟁 60주년 기획] 침묵의 땅 ④·끝 현대순교자 시복시성, 순교자의 땅
‘죽음의 행진’ 속에도 당당히 증거한 신앙
현대순교자, 순교 명맥 잇는 신앙의 증인
시복시성 노력과 함께 열심한 기도 필요
발행일2010-06-27 [제2703호, 16면]
▲ 6·25 전쟁 중 폐허가 된 덕원수도원 성당(왼쪽).
▲ 1949년 덕원수도원 폐쇄 후 독일인 선교사들은 옥사하거나 총살당했고, 나머지는 북한 자강도 전천군의 옥사덕 수용소에 수감됐다. 오른쪽 사진은 1954년 수용소에서 살아남은 가브리엘 프룀머 신부(무릎꿇은 이)가 상트 오틸리엔 수도원에 도착해 감사기도를 드리는 모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