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벽 6시30분, 기차가 출발했다.
자리를 찾는 승객들의 분주함, 여느 기차 분위기와 마찬가지다. 하지만 곧 기차 안 방송이 시작되고 분위기는 변했다. 승객들이 저마다의 짐에서 무언가를 꺼내 들었다. 묵주다. 1호차부터 10호차까지 기차를 가득 채운 700여 명의 승객들이 방송을 따라 한목소리로 기도를 시작했다. 아침기도로 시작해 103위 한국 성인 호칭기도, 고통의 신비까지 이어지는 기도가 기차를 가득 채웠다. “순례의 길을 가는 동안 저희 가족들에게 영육이 건강하도록 은혜 주시고….” 한목소리로 울리는 ‘순례자의 기도’에 열차 소음도 더 이상은 끼어들지 않는다. 기차가 쉼없이 달린다. 아니, 거대한 성전이 기차 선로를 따라 움직이고 있었다.
20일 새벽, 대구 대명본당(주임 김수영 신부) 신자들은 성당을 찾는 대신 대구역으로 향했다. 1여 년 전부터 계획된 ‘가족사랑 추억의 기차 성지순례’날이다. 본당 설립 37주년, 주보 성인인 세례자 요한의 축일에 맞춰 준비된 행사. 평소 주일 미사 참례객이 800여 명인 점을 감안하면 몸이 불편하거나 개인 사정이 있는 이를 제외한 대부분의 주일 미사 참례자가 참여한 것이다.
김수영 주임 신부는 이례적인 높은 참여율을 “꾸준한 준비 덕분”이라 설명했다. 2년 전 본당에 부임한 이후 김 신부는 ‘구역·반 모임 강화’에 총력을 기울였다. 그 첫걸음으로 가정방문, 구역 미사 등을 활성화했다. ‘전신자 참여’를 목표로 한 2008년 체육대회를 시작으로, 2009년에는 전신자 1박2일 침묵 피정을 이끌었다. 몇 해에 걸쳐 신자들의 유대를 강화시킨 결과 열차 성지순례의 높은 참여율이 가능했다는 것이다.
성지순례에 열차를 선택한 것도 다양한 연령대의 신자를 모두 고려했기 때문. 장거리 성지순례를 버스로 이동할 경우, 고령자·어린이는 멀미·화장실 문제 등으로 참여하기가 어렵다. 40여 명이 나누어 타야하는 버스와 달리 한 기차에 어울려 타면서 서로를 잘 모르던 교우들이 친교를 나누는 효과도 거둘 수 있다. 저마다의 아련한 추억에 잠기는 것도 기차여행의 장점. 그래서 여행명도 ‘추억의’ 기차 성지 순례다. 27일에 세례를 받는 예비자 26명, 회두한 냉담교우들도 승객 명단에 이름을 올렸다.
김 신부는 “신앙인으로 각자 솔선수범하고 서로 의지하는 ‘기본에 충실한’ 신앙 공동체를 만들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면서 “구역·반 모임 등이 활성화되자 자연스레 냉담자도 돌아오고 본당 행사에 대한 관심과 참여율도 높아졌다”고 말했다.
대구역에서 출발한 기차는 3시간 30분 동안 ‘쉼 없이’ 달렸다. 정규 편성에 없는, 신자들을 위해 제공된 특별열차인 만큼 다른 역에 정차할 필요도, 서로 다른 목적지에서 승객이 내리는 일도 없다. 함께 출발해 같은 목적지를 향해 달리는 ‘우리들만의 열차’인 셈.
목적지 충북 제천이 다가오는 시각, 안내방송이 나왔다. “교우 여러분, 고해성사를 보실 분은 7호차와 8호차 사이로 와주시기 바랍니다.”
7호차와 8호차 사이 작은 공간에서 고해성사가 이뤄지고 있었다. 흔들리는 열차 안에서 신부님을 대면하고 고해성사를 하는 진풍경. 신자들은 그렇게 마음의 짐을 덜고 성지로 향했다.
제천 배론성지 도착. 사위·딸과 함께 처음으로 기차를 탄다는 생각에 소풍 전날 어린이처럼 들떠 잠도 제대로 못 잤다는 이선옥(84·안나) 할머니도, 2살·6살·9살 자녀 때문에 여행이 쉽지 않지만 기차여행이라기에 함께 할수 있었다는 유순득(37·세라피나)씨도 모두 즐거운 표정이다. 내 가족과 남의 가족이라는 경계는 이미 허물어졌다. 아이들은 처음 만나는 또래 친구들과 자연스레 어울리고, 행사를 준비한 봉사자와 참여자가 하나가 됐다. 언니를 따라 몇 년 전 세례를 받고 성지순례도 언니와 함께 왔다는 백경자(56·에밀리아나)씨는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큰 사고도 없이 거대한 물결처럼 일사불란하게 움직이는 것을 보니 새삼 천주교 신자임이 자랑스럽다”고 소감을 전했다.
배론성지의 대성당, 700여 명의 신자가 성전을 가득 채우고 미사가 시작됐다. 달리는 기차 안에서도, 성전에서도 신자들의 모습은 같았다. 한 목소리로 성가를 부르고, 한 마음으로 기도를 한다. 장소는 중요한 것이 아니었다. 신자들이 한 마음으로 모이는 곳, 기차 안도 성지도 그렇게 그들만의 성전이 되었다.
■ 열차 성지순례는…
열차 성지순례를 하는 방법은 2가지다. 미리 정해져 있는 정규 열차의 좌석을 예약하는 것과 특별 열차를 편성받는 방법. 지자체별로 다른 기준을 정해두고는 있지만, 평균 40명이 넘으면 코레일과 지자체가 연계 제공하는 특별할인이나 기차역에서 목적지까지의 전세 버스 이용, 문화해설사의 안내 등의 서비스를 제공받을 수 있다. 특별히 배정되는 임시 열차의 경우 최소 432명, 즉 1호당 72인 기준인 기차 6호를 채울 인원수가 되어야 하며, 출발 예정 날짜 두 달 전에 미리 신청을 해야 한다. 전국 어디서나 코레일을 통해 신청 가능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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