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해박해로 순교한 이들 중, 박해자들의 기록에 신앙을 굳게 지키고 순교한 것으로 나타나는 사람들은 대부분 신앙의 못자리로 알려진 내포지방 출신이었다. 그들은 1827년에 체포되어 오랫동안 전주 감영의 옥에 갇혀 있다가 12년 뒤인 1839년의 기해박해때 순교하였는데, 초기의 순교자들과 마찬가지로 시복 대상자로 선정되지 않았던 탓에 우리에게 잘 알려져 있지는 않다. 그러나 교회측 기록과 관변측 기록에 모두 그의 순교행적이 분명하게 나타나고 있으므로 앞으로「하느님의 종」으로 선택될 수 있을 것이다.
그중 한 사람인 정태봉(鄭太奉, 바오로)은 내포 지방의 덕산 출신으로 관명이 「만보」인데 신자들은 주로 아명인「태봉」으로 불러 왔다. 내포의 회장으로 활동하다가 1797년의 정사박해로 체포되어 덕산 관아에서 매를 맞아 죽은 정신필(베드로)은 바로 그의 사촌 형이다. 이 사실에서 볼 때 바오로의 집안도 일찍부터 신앙을 받아들였고, 그 또한 어려서부터 신앙 생활을 하였을 것으로 생각된다.
바오로는 일찍 양친을 여의고 5촌 당숙네 집에서 성장하였다. 친척집에 얹혀 사는 동안에는 마치 종과 같은 대접을 받으며 어린 시절을 보내야만 하였으나 온순한 천성을 지닌 탓에 많은 시련을 인내로 참아내면서 오로지 수계 생활에만 정성을 다하였다. 그러다가 자립할 나이가 되자 전라도의 용담 고을로 이주한 뒤 항상 신앙의 가르침을 따라 생활하면서 신자로서의 본분을 다하였다. 뿐만 아니라 교회 서적을 한 권 얻으면 끝까지 읽은 뒤에야 덮을 정도로 교리를 익히는데 열심이었다.
한편 그는 고향 일대에서 탄생한 순교자들의 모범을 본받아 언제나 순교할 원의를 간직하고 있었다. 교회측 기록에서는 이에 대해『그는 가끔 도마를 턱밑에 갖다 대고「이런 자세로 칼을 받으며 내 영혼을 구할 수 있을 것이다」라고 되뇌이곤 하였다.』고 전한다.
박해가 일어났다는 소식을 듣고 바오로는 처음에는 무모한 짓을 하지 않기 위해 몸을 숨겼으나 배교자의 밀고로 포졸들에게 발각되고 말았다. 이 때 포졸들이 그의 이름과 용모를 정확히 알아보지 못하였으므로 짐짓 딴 사람인 체하면 위험을 모면할 수가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순교의 좋은 기회를 놓치지 않기 위해 자신의 신분을 순순히 밝히고 포졸들을 따라 나섰다. 용담 관아로 끌려가 한 차례 문초와 형벌을 받은 그는 곧 전주 감영으로 이송되었다.
전주에 이르자 지방 관아에서 이미 신앙을 중거한 여러 동료들이 그곳에 같혀 있었다. 이때부터 그들은 서로를 의지하며 용감하게 시련을 이겨내자도 권면하였고, 바오로는 평소에 가지고 있던 순교의 원의를 이를 작정으로 주리를 틀고 뾰족한 몽둥이로 찌르는 형벌을 받으면서도 신자임을 밝힐 뿐 어떠한 유혹에도 결코 입을 열지 않았다. 그러므로 감사는 그를 배교시킬 수 없음을 알고, 그가 절대로 다른 교우들의 이름을 대지 않으리라고 생각하여 형리들에게 다시 옥에 가두어 두도록 명하였다.
이어 전주 감사는 조정에 장계를 올려 바오로와 그 동료들의 행실을 설명하면서 악랄한 사학(邪學)의 무리로 보고하였다. 그러나 어찌된 영문인지 형조에서는 어떠한 판결도 내리지 않은 채 기한도 없이 그들을 옥에 가두어 두도록 명하였다. 바오로는 이때부터 12년 동안을 옥에서 지내야만 하였다. 그 동안 배교하고 석방될 기회가 여러 번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오로지 동료들을 권면하거나 기도 생활에만 열중할 뿐 다른 행동이나 기색을 나타낸 적이 없었다.
그러던 중 기해박해가 일어나 다시 신자들이 체포되기 시작할 무렵에 전주 감사는 다시 한 번 조정에 장계를 올려 옥에 갇혀 있는 신자들의 처분을 물어 사형 판결을 받게 되었다. 바오로는 이 소식을 듣고는 기쁨에 넘쳐 정성으로 감사의 기도를 드렸으며, 마음이 약해질까 두려워 아내와 아이들을 처형장에 오지 못하게 해달라고 형리들에게 부탁하였다. 그런 다음 사형 당일이 되자 옥중에서 끝까지 용기를 지닐 수 있도록 마음을 다잡고는 군중들이 가득찬 장터로 나가 칼날 아래 목숨을 바쳤으니, 이렇게 순교의 영광을 얻은 때는 1839년 5월 29일로, 그의 나이 44세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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