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故) 양한모(아우구스티노) 선생은 한국교회의 평신도 신학을 개척해온 거목(巨木)으로 공산주의자에서 가톨릭으로 귀의한 후 20여년 동안 불모지인 평신도 신학 분야에 커다란 한 획을 그은 것으로 평가받고 있다.
대표적인 평신도 신학자로서 그의 면모는 「복음과 사회와 교회」, 「신도론」, 「한국 천주교회 200주년을 생각한다」, 「신도 그 하찮은 존재인가」, 「교회와 공산주의」, 「민족 통일과 한국 천주교회」, 「조국은 하나였다」, 「마르크스에서 그리스도에로」등 10여 권의 저술에서 그대로 드러난다. 이들 저서들은 불모지였던 평신도 신학, 특히 신도 신학과 통일 사목 분야의 이정표로서 높은 평가를 받고 있다.
하지만 그가 이처럼 가톨릭 신앙에 깊이 매료되어 신학연구에 몰두하게 되기까지 그는 한국 역사의 질곡과 함께 파란 많은 인생 역정을 거쳐 왔다.
고향에서 소학교를 마치고 서울로 이주, 제2고보(경복중학) 2학년때 16세의 나이로 공산주의에 심취한 그는 일제하의 항일운동을 거쳐 해방 후 조선공산당 서울시 용산마포 당부 선전부책을 맡는다. 49년 조선노동당 서울시당 부위원장으로 9월 폭동혁명의 총책을 맡았던 그는 그러나 이념에 대한 회의와 공산주의 실상의 모순을 자각하고 전향한다.
하지만 공산주의를 포기함으로써 생긴 정신적 공허와 공백이 한동안 그를 괴롭혔다. 그때 장면 박사의 권면과 고(故) 현석호씨와의 교분을 통해 천주교에 귀의한 그는 비로소 영혼의 평화를 얻고 이후 신학 연구에 몰두하게 된다.
영세후 3년 만인 1971년에는 가톨릭대학교 신학부에 청강생으로 등록해 5년간 신학교 전 교과 과정을 이수한다. 신학교 교육을 마친 그는 이내 신도신학과 통일 사목 이론에 관한 여러 권의 저술을 펴내고 72년 크리스찬 사상연구소를 설립해 공산주의 연구를 통한 통일사목 방안 제시 및 평신도 신학 연구의 산실로 이용했다.
그의 생전의 숙원은 자신이 못다 한 신도신학연구와 교회내 학술 창달의 지원ㆍ육성이었다. 하지만 오랜 지병으로 끝내 「신도론」의 증보판조차 이루지 못하고 92년 10월 8일 타계해 뜻있는 이들을 안타깝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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