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느님 존재의 궁극성을 말하기 위해 리치는 우주적 원리로써 존재의 최종근거를 나타내는 도(道)와, 이에 근거한 윤리적 개념으로써 덕(德)을 넘어서야 할 필요를 느꼈다. 리치는 ‘하느님은 도와 덕이라고 말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도와 덕의 근원이다’(非所謂道德也, 而道德之源也)라고 말한다.
물론 리치의 이런 표현은 아직 도와 덕이 가리키는 개념적 이해를 전제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일상적 의미에서 가장 중요한 개념어인 도(道)와 덕(德)을 뛰어넘는 존재를 하느님으로 상정하고 있을 뿐이다. 서양과 동양이 서로 다른 사유의 틀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염두에 둔다면, 충분한 논의 없이 전개하는 호교적 수준의 주장은 다시 검토해야 할 필요가 있다. 우리는 이런 주장을 충분히 검토했거나 다수가 수긍할 만큼 진전된 논의를 쉽게 들을 수 없는 것도 사실이다. 어쨌거나 부정신학의 관점에서 출발한 하느님의 무한성 이해를 동양의 사고에 적용하기 위해 아직 넘어야 할 산들이 있다.
리치는 동양의 경전에서 나타나는 개념들의 경계를 어떻게 넘어서야 했을까? 사실 이런 작업은 후대에 남겨진 지난(至難)한 일로써 동서양의 사유방식이 어떻게 만나는지, 어디에서 상호 이해의 고리를 찾을 수 있을지 오랜 숙고의 과정이 필요할 것이다. 예를 들면 동양의 세계에서 하늘과 땅은 창세기의 언급과 달리 인간의 경험에서 가장 크고, 일상의 영역을 넘어서는 무한대를 가리키는 은유 중의 은유이다.
그래서 리치는 서양의 사유 틀 안에서 하느님의 무한성을 이해시키기 위한 발언을 한다. ‘하늘도 아니고 땅도 아니지만 그 높고 밝고 넓고 두텁기로는 오히려 하늘과 땅보다 더 합니다’(非天也非地也 而其高明博厚 較天地猶甚也). 그러기에 그리스도교 신앙의 하느님을 ‘수용하고 실을 만한 공간은 없다’(無處可以容載之). 리치는 은유적 의미의 경계를 무너뜨리면서 하느님 존재의 무한성을 제시하기 위해 동양적 공간 개념을 일방적으로 깨뜨린 것이다.
또 공간적 크기만 하느님의 무한성을 나타내는 요소는 아니다. ‘움직이지 않으면서 모든 운동의 최초의 원인이 되는’(不動而爲諸動之宗) 하느님은 시간적으로도 무한한 존재이다. 그분은 과거도 미래도 없으며(無往無來), 시작도 없고(無始) 마침도 없다(無終). 그분의 지혜는 만세 이전의 과거나 만세 이후의 일일지라도 바로 눈앞에서 보고 있는 것과 같다(其知也…而往之萬世以前, 未來之萬世以後…如對目也).
시공간적으로 하느님의 무한성은 창조계의 모든 개별 존재자들을 초월해 존재하는 하느님의 속성이다. 동시에 만물과 함께 만물 안에 내재하는 하느님은 창조계 안에 살고 있는 우리와 별도로 존재하는 분도 아니다. 그렇다. 리치의 하느님은 창조계의 모든 피조물을 그대로 버려두지 않는다. 하느님은 창조계의 모든 피조물들이 존재의 완성을 이룰 수 있도록 관계를 맺고 있는 것이다. 극히 제한적인 인간 인식의 차원에서 보면 초월적이며 내재적인 하느님은 불가근불가원(不可近不可遠)의 존재로 인간에게 오신다. 그렇다면 어떻게 무한한 존재인 하느님이 미물의 존재자들과 관계하시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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