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문을 통해 어슴푸레 새벽동 터오는 것이 느껴지는 오전 5시30분. 서울 혜화동 주교관 식복사 「큰 언니」박순옥(카타리나)씨는 어김없이 잠자리를 털고 일어나 세면을 마치고 주방으로 향한다.
1시간여를 지나 오전 7시경. 주교관에 거주하는 특수사목 담당 14명 사제들 가운데 비교적 출근시간이 빠른 ㄱ신부 등 학교 직무를 맡고 있는 사제들이 식당문을 열고 들어서면서 박씨의 아침 시간 템포가 빨라진다.
「교구청 ㄱ신부님은 쥬스 한 잔을 아침 대신 드셔야 하고 ㅈ신부님은 오늘 식사할 시간도 없으시다고 했지, 몸이 부실해 지시면 어떻게 하나」출근을 위해 바쁘게 주교관을 나서는 여러 사제들의 뒷모습을 보며 박씨는 순간적으로 각 사제들의 평안한 하루와 건강을 위한 화살기도를 올린다.
9시30분경까지 김수환 추기경을 포함 식당을 오가는 10여명의 사제들의 아침식사가 어느정도 마무리되면 박씨는 7명의 주방 빨래방 아주머니들과 의견을 나누며 방청소 빨래 점심식사 준비에 들어간다.
12시 점심식사 후 오후시간은 주교관의 「머슴이자 장돌뱅이」라고 자처하는 박씨의 말처럼 시장보기와 주교관에 필요한 물건 구입이 주요 일과가 된다. 그래서 박씨의 오후시간은 거의 외출이 될 수밖에 없다. 박씨가 어느정도 숨을 고르고 개인적인 일을 보게 될 여유를 갖는 시간은 오후 6시 저녁식사가 끝난 후. 이때 미뤄둔 친구 지인들과의 만남을 갖기도 하지만 매일 비슷한 일이 반복되는 것 같으면서도 자리를 비울 수 없는 특수한(?) 여건이기 때문에 박씨가 고정적인 개인시간을 내기는 매우 애매하다.
직원들을 포함 24명이라는 대식구를 보살펴야 하고 「어느 곳에 수리가 필요한지」「필요한 물품들은 무엇인지」주교관 곳곳을 돌봐야 하는 일이 만만치 않기 때문이다. 주방 빨래방 아주머니, 관리인 아저씨 등 직원이 모두 출퇴근 근무를 하고 있어 주교관 전체 살림살이 정리는 「머슴」이라는 말처럼 박씨의 몫일 수밖에 없다.
박씨가 사제들의 먹거리 입을거리 잠자리를 보살피게 된 것은 10여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사촌오빠인 대전교구 ㅂ신부가 본당을 밭으면서 식복사를 하게 된 것이 계기가 됐다. (순교자 집안 출신인 박씨는 친가 외가를 합쳐 일곱명의 사제를 친척으로 두고 있다.) 이후 서울대신학교 서울대교구청 별관 등에서 일하다가 6년전 현재의 혜화동 주교관으로 옮겨왔다.
「잠시 다른 사람을 구할 때 까지만 있겠다」고 시작했던 것이 어느새 10년이 됐다고 말하는 그는 이제 사제들을 보살피는 일이 「하느의 소명이자 성소」라고 여긴다.
혜화동 주교관은 70대인 김수환 추기경을 비롯 30대부터 40대 50대 60대 등 다양한 연령층의 사제들이 생활하고 있어 개인별 취향을 고려하는 것이 어려울 때도 있지만 한편 여느 대가족의 모습을 보는 듯한 느낌이어서 「가족과 같이 대하자」는 박씨의 생각은 자연스럽게 행동으로 녹아든다. 주방 빨래방 아주머니들에게 박씨가 늘상 강조하는 것도 직장일을 마치고 돌아온 가장들이 최근 후 집에서 편안함과 푸근함을 느끼듯 그렇게 사제들을 보살펴 드리자는 것이다.
「시쳇말로 식모인데 이것은 내 일이 아니야」처음 식복사 권유를 받았을 때 느껶던 고민을 웃음으로 넘기는 박씨. 이제는 그간의 10년 식복사 생활이 「후회없는 삶」이라고 여긴다. 앞으로도 여건이 주어지만 계속 이 일을 통해 나름대로의 성소를 지켜나갈 생각이다.
세속적인 것을 끊어버리고 하느님을 사랑하기 때문에 그 길을 가려고 노력하는 사제들의 모습은 박씨에게 늘상 존경스러운 모습으로 다가온다. 자신의 식복사 일은 바로 그러한 「존경」에서 힘을 얻는다는 생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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