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기조강연 : 최양업 신부의 선교활동과 시복 추진의 의미 - 최석우 신부(한국교회사연구소 소장)
“최양업 신부의 활동과 업적은 한마디로 선교로 요약될 수 있다”
‘성직자들의 사목적 모범’ 의미에서 시복추진
최양업 신부의 활동과 업적은 한마디로 「선교」로 요약될 수 있다.
그는 박해 시대의 본토인 성직자로 이 땅에 파견되었고 실제로 자신의 임무에 충실하였다. 교우촌 순방, 교리 연구, 본토인 성직자 양성을 위한 노력, 천주가사의 저작 등은 선교 의무에 충실하기 위해 수행된 갖가지 요소들이다.
뿐만 아니라 선교 활동 도중에 과로로 인한 장티푸스로 선종했으니 끝까지 선교사명에 충실했음을 알 수 있다.
따라서 최양업 신부는 증거자 즉 영웅적 덕행을 남긴 사람으로서 시복이 추진될 수 있다.
가장 중요한 요소는 영웅적 덕행과 기적을 찾아내고 확인하는 일이다.
■ 제1주제 : 최양업 신부의 생애와 선교활동의 배결 - 차기진 박사(한국교회사연구소 연구실장)
“중국신자를 사목한 최초의 한인사제로 귀국 후 활동은 처음부터 끝까지 교우촌 방문이었다”
민중의 고통 언급하며 언제나 백성의 편
최양업은 1821년 1821년 3월 1일 충청도 홍주의 다락골 새터에서 태어나 1861년 6월 15일 경북 문경에서 사망했다.
1832년경부터 과천의 수리산 뒤뜸이에 거주했으며 1836년 이곳에서 신학생으로 추천되었고 1837년 6월 7일 마카오에 도착했다.
1842년 상해, 태장하, 백가점, 양관을 거쳐 소팔가자에 가서 공부를 계속했다.
1847년 홍콩 파리외방저니교회 극동대표부로 가서 페레올 주교의 프랑스본 「기해·병오박해 순교자들의 행적」을 라틴어로 번역했다.
같은 해 7월 28일 파리에르가 지휘한 글로와르호를 타고 조선으로 갔으나 배가 좌초돼 귀국에 실패했다.
상해로 와 예수회 서가회 신학원에서 공부를 마치고 1849년 4월 15일 마레스카 주교로부터 사제품을 받았다.
이후 요동에서 생활하다 12월 3일 귀국에 성공했다. 서울을 떠난 지 13년만의 일이었다.
최양업 신부의 활동은 서품 직후 요동에서부터 시작된다. 요동신자들을 위해 병자성사를 집전하고, 주일과 축일에 강론을 맡았으며, 어린이 교리와 고해성사를 담당하는 등 7개월동안 사목했다.
따라서 최신부는 중국신자들을 공식적으로 사목한 최초의 한국인 사제이다. 최신부는 귀국 후 활동은 처음부터 끝까지 교우촌 사목순방이었다.
1861년 6월까지 11년 6개월동안 선교사들이 순방할 수 없었던 어려운 지역을 담당했다.
최양업 신부가 귀국해 활동하던 시기는 1839년 기해박해 이후 조정의 천주교 정책은 휴면기에 접어들었다.
이러한 가운데 프랑스 선교사들이 계속 입국했고, 천주교는 새로운 지역으로 퍼져나갔다.
한국사적으로는 민중봉기가 일기도 하고 새로운 민중사상이 발생하던 시기였다. 최양업 신부는 반상의 갈등과 양반의 착취, 민중의 고통을 언급하면서 언제나 민중의 편에 서고자 했다.
조선 입국의 대안을 찾을 수 없었던 최신부가 1847년 라피에르의 원정에 동승한 것은 제국주의의 실체를 파악하지 못한 안혜성도 지니고 있으나 궁극적으로는 조선의 복음화 노력으로 보인다.
■ 제2주제 : 최양업 신부의 서한에 대한 교의신학적 고찰 - 류한영 신부(충주 문화동본당 주임)
“신분과 계급을 초월한 교회 구성원들 간의 일치를 강조했다”
동양적 색채 띄면서도 전통신앙에 충실
탁덕(최양업 신부)는 하느님을 「아버지로」생각한다. 서간에서는 천주가사에서 보듯이 하느님을 「대부모」로 보지 않고 「아버지」로 명확히 언급한다. 또한 하느님의 자비는 그분의 정의와 모순되지 않고 배제하지도 않음을 보여준다.
그리스도께 대해서는 「수난 받은 구세주」로 이해한다. 그분의 고귀한 피로 인간의 구원이 이뤄졌고 「머리」이신 그분의 길을 따르는 것이 신앙인의 모습니다.
십자가로 인해 하느님의 자비와 능력이 연약한 우리 「마음」안에 들어오며, 우리는 세상과 악의 세력을 거술러 승리하게 된다.
탁덕에게 「마음」또는 「가슴」은 하느님의 능력이 응집되고, 수난 받으신 그리스도와 하나가 되는 곳이다.
탁덕은 교회에 대해서 「양우리」라는 표현을 쓰며 그리스도와 일치하여 있는 모습을 말한다. 교계제도 안의 일치를 언급하면서 탁덕은 조선교회가 자모이신 로마교회와 일치하여 있고, 교황이 최고 목자임을 인정한다.
또한 주교와 사제와 성도들 간의 친교를 언급하며, 양우리 안에 있는 구성원들 간의 일치를 매우 강조한다. 그 일치는 그리스도의 정신으로 이뤄지는 것으로 신분과 계급의 차별을 초월하는 것이고 가나나하고 소외된 이들을 배제하지 않는 것이다.
한마디로 탁덕의 신학적 사고는 안티오키아의 성 이냐시오와 성 토마스의 전통을 충실히 따르고 있으며 또한 유교적이고 동양적인 색채를 띤다.
「천주」와 「머리」는 위에서 아래로 내려오는 하느님에 대한 의식구조를 반영하고 「자비」와 「마음」은 은총을 받아 위로 올라가는 인간에 대한 모습을 가리킨다.
천주가사 중 「선종가」「사심판가」「공심판가」는 같은 저자의 작품일 것으로 사려된다. 또한 이 가사의 신학적 사상은 최양업 신부의 서한집에 나타난 그것과 일치한다.
그러나 최양업 신부의 작품이라고 여겨지는 「사향가」에는 몇가지 의문점이 제기된다.
■ 제3주제 : 최양업 신부의 선교활동과 그 의미 - 박금옥 수녀(포교 성 베네딕도 수녀회)
“배워야 할 것은 하느님 나라에 대한 올바른 인식과 신앙과 열정”
매년 7천리 다니며 목숨걸고 성사집전
최양업 신부는 『조선에는 모든 법이나 습관이나 풍습이 오로지 교회법을 지키지 못하게 방해하기 위해 제정된 것 같습니다』라고 보고하고 있다.
당시의 문화가 이러했던 만큼 「복음과 문화와의 불합관계」는 극한 상황이었다. 당시의 선교사들이 문화 부정론자들이었다는 비판이 있지만 현대의 신학자들이나 신자들은 문화 과찬론적인 경향이 있다.
이 시대의 교우촌들은 사도행전에 나타난 초대 예루살렘 공동체를 닮았다.
이 교우촌들은 현대의 기초 공동체가 지향하는 바대로, 복음화의 못자리였고 사랑의 문화에 바탕을 둔 새로운 사회의 출발점이었다.
교우들은 겸손과 인내와 친절로 마을 전체가 회개하여 교우촌이 된 경우, 박해 사건으로 마을 전체가 회개하게 된 이야기들이 있다.
서한에는 최양업 신부 자신의 깊은 겸손이 드러나 있을 뿐만 아니라 이를 중요한 덕행으로 가르친 것이 확실하다.
성덕에 대한 최양업 신부의 열정은 열정으로만 끝난 것이 아니라, 실제로 최양업 신부가 신심과 덕행과 뛰어난 분별력을 소유할 수 있게 해주었다.
스승들과 동료 성직자들과 주교의 편지들에서 본래 뛰어난 재능을 가진 최양업 신부가 신심과 덕행과 훌륭한 분별력의 소유자임을 말하는 구절들이 많다.
최양업 신부의 생애와 선교활동에서 배워야 할 것은 무엇보다도 진정한 하느님 나라에 대한 올바른 인식과 신앙과 희망과 열정이다.
하느님 나라에 대한 올바른 인식과 신앙 때문에 그분은 뛰어난 성덕과 분별력을 가질 수 있었다.
이 성덕과 분별력에서 지금의 우리가 배워야 하는 선교 방법과 선교활동이 나왔다고 본다.
매년 7000리를 다니면서 교우촌을 방문하는 최양업 신부의 모습에서 사도행전의 성 바오로를 본다.
목숨을 걸고 성사를 주는 모습에서 「성사를 집행해주는 사제가 없으며 자기 자신과 사랑의 선교회의 수많은 수도자들이 아무 것도 할 수 없다」고 말한 마더 데레사를 본다.
■ 제4주제 :
박해 시기의 모든 난관과 어려움을 극복하며 자신에게 주어진 사제적 소명을 헌신적으로 수행하다가 세상을 떠난 최양업 신부의 삶에서 깊은 감명을 받게 되며, 사제로서의 훌륭한 영성적 삶의 모범을 발견하게 된다.
그는 무엇보다 삼위이신 하느님 안에서 긴밀한 사랑과 일치를 이루며 그분과 깊은 내적 삶을 살았다. 그의 하느님과의 친교는 하느님의 섭리와 자비에 대한 철저한 신뢰에 바탕을 둔 것으로써 박해로 인한 온갖 어려움 속에서도 그것을 극복하고 살아갈 수 있었던 원동력이 되었다.
그는 교회 안에서 「이웃」들과 매우 긴밀한 일치의 삶을 살았다. 장상 주교들은 언제나 존경과 순명의 정신을 가지고 대했고, 동료 사제들과도 친밀한 형제애 안에서 만나며, 물질적인 면에서 뿐만 아니라 영적인 면에서까지 도움과 협력을 주고 받았다.
그는 신자들과도 기쁨과 어려움을 함께 나누며 목자로서의 사랑을 가지고 활동했다.
그는 복음을 전하는 것이 참으로 조선을 구원으로 이끄는 길이며 또한 조선을 개화로 이끄는 데 도움이 된다고 보았다. 그래서 그는 복음전파에 대한 뜨거운 열성을 가지고 「만일 필요하다면 자기 피를 흘릴」각오를 가지고 교우촌을 방문했다. 그의 가난 순종 인내의 삶은 당시 외적으로 박해 중에 있는 신자들에게 훌륭한 증거가 되었을 뿐 아니라, 오늘의 복음 전도자들을 위해서도 훌륭한 모범이 된다고 볼 수 있다.
그는 여러가지 인간적 덕들 가운데 특히 겸손과 순종, 인내의 덕을 훌륭히 실천했다. 이러한 덕들을 자신의 사제로서의 삶과도 훌륭히 조화를 이루며 실천했다. 또한 마리아께 「자녀적 신뢰」를 가지고 자주 보호와 도움을 요청하는 기도를 드렸다.
그래서 그의 기록들 가운데는 마리아 신심이 두드러지게 드러나며, 예수 성심 신심과 성인 신심은 상대적으로 적게 언급된다. 그의 신심에 대한 기록은 전체적으로 양은 적지만 매우 깊은 내용들을 담고 있음으로써 그의 영성생활에 많은 비중을 차지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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