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초등학교 시절이던 60년대는 아직 민족 상잔의 비극이었던 전쟁의 포화나 그 연기로부터 자유롭지 못한 시대였다. 전쟁을 직접 경험한 것도 아닌데 어린 나에게 이미 전쟁의 공포는 너무 깊게 자리잡고 있어 친구들한테 군대에 간 외삼촌 때문에 우리는 전쟁이 일어나도 끄떡없다고 자랑하고 다녔다. 바로 전쟁과 반공을 지배 이데올로기로 무장한 시절이었다.
「간첩 리철진」을 보면서 공산당과 간첩이라면 진저리를 칠 정도로 미워하고 원수로 여겼던 지난 날이 문득 생각났다. 주님께서 원수를 사랑하라고 하셨는데 그 원수들은 사랑할 가치조차 없는 금수같은 존재들이었다. 오랫동안 그랬다. 그러나 이 영화에서는 간첩이 하나의 직업으로 간주되는 과연 1억을 받고 저 인간성 좋은 간첩을 신고해야겠다는 생각이 도무지 안드는 이데올로기와는 거리가 먼 영화였다. 영화는 그 사회를 반영하는 거울이라고 한다. 그만큼 변화된 사회의 시각을 이 영화를 통해 접할 수 있다.
순진하고 인간적이고 진실한 간첩 리철진은 도무지 이 사회가 이상하기만 하다. 퍼포먼스와 같은 인생들, 돈이 인생의 전부이고, 고정간첩 오선생은 청소년폭력상담소 소장인데 아들은 학원폭력의 주인공이다. 간첩 리철진에게 양심은 그가 믿는 신념 다음으로 소중하다.동료 간첩을 제거하고 괴로움으로 술에 취해 택시를 타고 평양으로 가자고 외친다. 『당신들은 돈이면 무엇이든지 다 하잖아』라고 신랄하게 꼬집으면서…. 그는 우리가 갖고 있는 고정관념을 여지없이 무너뜨리고 당연하다고 생각하는 것들에 다시 한번 물음표를 갖게 만든다. 이 해학과 풍자는 만만찮다. 예수님이 당대 그 사회에 대한 풍자와 해학이 통쾌했듯이 말이다.
인간이면 누구나 자신을 인정해 주고 있는 그대로 보아주는 한 사람, 그 이상을 원한다. 엔도 슈사쿠의 「사해부근에서」라는 소설을 보면 예수님은 그 시대의 왕따였던 나병환자 곁에서 그를 시중 들어주고 함께 있어주고 그를 나병환자가 아닌 인간으로 받아들여주었기에 그 나병환자는 인간에 대해 절망하지 않고 늘 예수를 기억한다. 철진을 간첩이 아닌 한 사람의 인간으로 받아주었던 화이와 감정의 교감으로 이뤄지는 거울의 신에서 거대한 스크린에 증명사진 정도로까지 줌아웃되는 정서 표현의 절제는 과감해 보인다. 비록 그들의 관계가 너무 작위적이긴 하지만.
몇몇 장면의 비약과 코미디적인 요소, 그리고 일상적인 사물의 언어가 영화적 언어로 표현되는 것에 있어서의 한계, 매끄럽지 못한 구성 등 거슬리는 부분이 있지만 간첩인 리철진에게서 오히려 인간의 진면모를 발견하도록 유도하는 장치 등에 감탄하면서 새삼 떠오르는 말씀은 하느님은 간첩에게나 우리에게나 북한 형제에게나 남한의 택시강도에게나 똑같이 해를 비춰주시고 비를 내려주신다는 것이다. 이데올로기로 인한 죄는 미워하되 그는 결코 미워할 수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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