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하는 벗들인 불자 여러분, 부처님 오신 날을 맞이하여 축하의 인사를 드립니다. 구세주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 2000주년을 맞는 우리의 기쁨에 불자 여러분도 함께 해 주시기를 부탁 드립니다』(「부처님 오신 날」에 불자들에게 보내는 경축 메시지, 교황청 종교간 대화평의회)
석가탄신일을 열흘 남긴 12일, 명동 서울대교구청에서는 뜻깊은 만남이 있었다. 불교 조계종 총무원장 고산 스님이 정진석 대주교를 방문한 것이다.
정대주교는 이 자리에서 『종교 지도자간의 만남을 활성화해 국민들에게 희망을 주자』고 말했고 고산 스님도 『종교 지도자가 화합해야 국민들이 서로 존중한다』며 총무원을 방문해 달라고 요청했다.
정대주교는 며칠 뒤 고산 스님에게 축전을 보내 「부처님 오신 날」을 경축한다며 『중생의 구제를 위해 이 땅에 오신 부처님의 자비가 온 누리와 모든 사람들에게 골고루 비치기를 기원한다』고 말했다.
길상사(서울 성북동)는 고급 요정의 대명사이던 대원각을 기증받아 화제가 된 사찰. 지난 97년 12월 14일 열린 개원법회는 또 다른 이유로 관심을 끌었다. 회주 법정 스님의 초청으로 김수환 추기경이 스님과 불교신도 3000여명의 박수 속에 축사를 했다. 법정 스님은 그후 성탄절을 축하하는 메시지를 발표해 이에 답례했다.
이날 법회에 김추기경과 함께 참석한 춘천교구장 장익 주교는 법정 스님과 이미 20년 이상 교분을 나눠온 것으로 유명하다.
해마다 부활절이나 성탄절, 부처님 오신 날에 이처럼 가톨릭과 불교가 교분을 나누는 일이 늘어나고 있다.
구도자들끼리의 오랜 교분은 성당 신자들과 사찰 불자들간의 만남으로 이어지기도 한다. 성당에서 인근 사찰의 스님을 초청해 미사 강론을 청하거나 사찰에서 성탄절마다 문 앞에 「예수님 탄생을 축하합니다」라는 플래카드를 내걸고 스님들이 성탄미사에 참석하는 경우도 있다.
가톨릭과 불교는 사실 교리상으로 근본적인 차이가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서로가 다른 종교에 비해 호감을 갖고 있다. 이는 가톨릭이 비교적 타종교에 대해 열린 마음을 갖고 있고 불교도 배타나 독선을 멀리하는 전통이 있어 서로 독단적인 입장을 비켜서는 것이 상대적으로 쉽기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가톨릭 교회가 이처럼 불교를 포함한 타종교의 존재 의미와 가치를 인정하기 시작한 것은 그리 오래되지 않았다.
가톨릭이 처음 불교를 만난 것은 16세기. 선교사들에 의해 아시아에 복음이 전해지던 시기로 거슬러 올라간다. 프란치스코 사베리오는 일본에 머무는 동안(1549~1551) 선불교와 접했도 마태오 리치(1552~1610)를 비롯한 예수회 중국 선교사들이 불교식 복장과 삭발을 하고 서방의 승려로 행동했다.
하지만 제2차 바티칸공의호 이전까지 선교사들 대부분은 선교 지역의 종교와 문화 전통의 가치를 인정할 수 없었다. 다만 소수의 선교사들과 현지인 성직자, 수도자들이 불교의 정신과 참선에 대한 지식을 얻으려 노력했다. 이는 곧 공의회를 기점으로 교회의 타종교관에 변화를 가져오는 기초가 됐다.
공의회가 「비그리스도교에 관한 선언」에서 불교를 포함한 타종교와의 대화를 촉구한 후 아시아 교회는 불교에 대한 이해와 대화를 위해 노력했고 『타종교들 안에서 하느님 말씀의 씨앗을 발견할 수 있다』고 선언한 아시아 주교회의(FABC) 1차 총회(1974년) 이후 불교에 대한 체계적인 연구가 시작됐다.
불교에 대한 가톨릭의 견해를 아직 단정적으로 말할 수는 없다. 서로 다른 문화권에서 성장했고 교리도 서로 대치되거나 배타적인 부분이 있다. 본격적인 연구가 시작된 지도 얼마 되지 않는다. 상호 대화를 주저하는 주장도 계속 제기된다.
특히 타종교에 대한 개방적인 자세가 선언된 후 동양의 종교와 사상에 대한 연구의 일환으로 기도의 수행방법으로 선(禪)이나 요가 등을 도입하는 사례가 늘어나면서 교황청이나 한국 주교회의에서도 이에 대한 우려를 표시한 바 있다.
하지만 어쨌든 종교인들간의 대화와 화합은 「이 땅의 평화」를 위해 오늘날 절실하게 요청되는 과제이다. 「종교 평화 없이 세계 평화 없다」(1993년 미국과 인도에서 열린 「세계 종교 회의」주제)는 구호는 종교간의 만남과 상호 이해의 중요성을 한마디로 요약해준다.
특히 「세계 종교의 전시장」이라 할 만큼 다종교사회의 전형인 한국 사회에서는 갈수록 종교간 만남의 기회가 늘어남에 따라 종교간 만남을 어떻게 이룰 것인지에 대해 심각하게 고민해야 한다.
가톨릭교회의 입장에서는 「공동선의 실현」이라는 대사회적 종교적 의무를 어떻게 실천해나갈 것인가가 새 천년기 가톨릭 교회의 중요한 과제 중 하나이다.
하지만 교황청이나 한국 주교회의가 우려했듯이 그 만남 속에서 혼합주의나 무비판주의를 피하고 어떻게 자기 신앙의 정체성을 확립하는가 역시 심각한 고민의 대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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