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럽의 중세신학에 익숙한 리치가 창조주를 말할 때 ‘하느님은 만물의 기원이며 최종원인’으로 소개하는 것이지만, 하느님의 하느님 됨은 창조의 행위를 통해서 그 존재가 드러남을 의미했다. 게다가 앞에서 보았다시피, 요한복음서는 하느님의 아들 그리스도를 하느님 아버지의 창조행위에 존재론적으로 참여시킴으로써 하느님의 완전한 신성을 납득할 수 있는 기반을 제공할 수 있었다. 그래서 리치는 ‘하느님께서 꼴을 갖추지 못하고 텅 비어 아무것도 없었던 카오스(chaos) 한가운데서 만물의 기원을 열었던 것’(至其渾無一物之初 是必有天主 開其原也 창세 1,1 참조)이라고 주장할 수 있었다.
또한 인격주의에 기초한 하느님 존재에 대한 리치의 이해는 도가의 무(無)나 불가의 공(空)을 비판하는데 가장 기본적인 요소로 작용한다. 중국선비는 이 점에 관해 ‘공(空)과 무(無)가 문자 그대로 공(空-비어 있다)과 무(無-없다)를 의미하는 게 아니다’(空無者 非眞空無之謂)라고 지적하면서, ‘정신적인 요소가 아닐까’(乃神之無形無聲者耳)라고 묻는다. 그렇다면 정신적 차원에서 공(空)과 무(無)가 하느님과 무엇이 다를 것인가? 그러나 이런 질문은 인격주의에 기초한 하느님의 이해를 넘어서는 답변을 기대할 수 없다. 유가의 태극사상(太極思想)에 대해서도 공과 무에 대한 태도에서 보는 것처럼 리치의 답변은 인격주의에 근거하면서 흔들림이 없다.
사상적 차원에서 태극(太極)의 연원을 깊이 탐구할 바는 아니지만, 역경(易經)의 계사전(繫辭傳)을 우선 생각할 수 있다. 이 표현은 도교적 관념의 유가적 변용이라 주장할 수 있겠지만(周敦頤, 1017~1073), 리치는 태극(太極)이 비인격적이라는 사실 하나로 아주 간단하게 다룬다(太極非생天地之實 可知耳). 그리고 리치는 중국선비의 입을 빌려 태극은 이치(理)일 뿐으로 만물을 창조한 근원이 되지 못한다고 논증한다.
리치는 아리스토텔레스의 범주론(範疇論)에 근거해 사물을 실체와 속성으로 이해한다. 소략하게 말한다면, 실체는 자립성(自立性)을 의미하고 속성(屬性)은 의존성(依存性)을 가리킨다. 흰말(白馬)을 예로 들면, 말은 실체이고 흰색은 속성이다. 따라서 실체성이 하나를 의미한다면 속성은 무수하게 많을 수 있다. 털의 색깔은 무수히 많아서 말(馬)을 구별할 수 있지만, 말(馬)이란 사실에는 구분이 없다. 태극이 천지만물의 근원이 될 수 없다는 주장에도 동일한 논리가 적용된다. 태극을 이치(理)로 해석할 때, 이(理)는 자존하는 것이 아니다. 이(理)가 ‘사람의 마음에 있다’(在人心-육상산(陸象山), 1139-1192)고 하든, ‘사물에 있다’(在事物 주희(朱熹), 1130~1200)고 하든 독립적으로 실재하지 않는다. 이렇게 리치는 아리스토텔레스의 범주론에 의거하여 이치(理)를 속성이라고 설명했다. 실체와 속성의 존재를 시간적 선후 관념으로 파악하려고 하는 리치로서는 아주 당연한 판단이고 해석이기도 했다. 그러니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던 우주의 발생 초기에 아리스토텔레스적 속성에 불과한 이(理)가 존재의 자립성이나 독립성을 가질 수 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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