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까지 요동의 양관·개주·백가점·차쿠의 사적지는 그 이름만이 일부 교회사가들에 의해 알려져 왔다. 그러다가 이번의 중국 사적지 순례를 계기로 그 역사적 의미와 한국 천주교회와의 관계, 옛 성당과 교우촌의 위치가 처음으로 명확히 밝혀지게 되었다. 「차쿠~양관
」지역은 1842년 이래 1881년까지 조선 교회와 밀접한 관련을 맺은 곳으로, 베르뇌 신부와 최양업 신부의 사목지였으며 조선교구 대표부가 설치되었던 곳이요, 조선교구 임시 사목 관할 지역이었고, 박해 이후 조선 입국의 거점이었다.
심양(옛 봉헌) 남서쪽 300리, 대련 북동쪽 330리 지점에 위치한 개주(蓋州)는 한국 천주교회사의 기록에 자주 나타나는 지명으로, 만주 벌판 중에서도 조선교회와 유달리 관련이 깊었던 유서 깊은 사적지이다.
정확히 말하자면, 개주시 안에서도 처음 성당이 자리잡았던 곳은 시내 중심부에서 동쪽으로 40리 떨어진 곳에 위치한 농촌 마을 양관(陽關)으로, 이곳 양관 성당이 건립된 것은 1840년대 초였다. 개주 성당은 이보다 2~3년 뒤에 건립되었다.
1838년 만주교구(처음 이름은 요동교구)가 설정됨과 동시에 그 초대 교구장으로 임명된 파리 외방전교회의 베롤(Verrolles, 方 요한() 주교는 곧 개주의 양관을 만주 남쪽의 선교 중심지로 삼고, 이어 장춘 북쪽에 있던 소팔가자(小八家子)를 북쪽의 선교 중심지로 삼았다. 그런 다음 1845년 경에는 개주와 함께 이곳에서 남쪽으로 140리 떨어져 있는 백가점(白家店) 교우촌 인근인 차쿠에 성당을 건립하였다.
백가점은 차쿠의 강 북쪽 20리 지점에 위치해 있었으며, 차쿠 성당이 건립된 후 신자들이 이곳으로 이주하면서 점차 그 명맥을 잃게 되었다.
현재 차쿠는 서해(중국명은 황해) 연안의 장하시(옛 태장하) 북쪽 50리 지점에 위치해 있으며, 행정 구역상으로는 장하시 용화산(蓉花山)으로 불린다.
양관·백가점·차쿠 등이 조선 교회와 관련을 맺게 된 것은 양관 성당이 건립된 지 얼마 되지 않아서였다. 우선 백가점 교우촌은 1842년 10월에 마카오를 떠난 김대건(안드레아)과 최양업(토마스) 신학생, 조선 선교사 매스트르(李 요셉) 신부, 만주 선교사 브뤼니애르(寶 막시모) 신부 등이 요동 땅에서 처음 거처를 정한 곳으로 유명하다.
이후 김대건은 1843년 3월까지 백가점을 거점으로 하여 조선 입국로를 탐색하였다.
1843년 12월 31일 양관 성당에서는 베롤 주교의 집전으로 제3대 조선교구장 페레올(高 요한( 주교의 성성식이 거행되었다. 그때 매스트르 신부를 비롯하여 최양업·김대건 신학생도 참석하여 함께 기쁨을 나누었다.
이어 1854년에 제4대 조선교구장으로 임명되는 베르뇌(張敬一 시메온) 주교는, 그에 앞서 1844년 이후 10여년간 만주 선교사로서 주로 양관·개주·차쿠를 중심으로 사목 활동을 하였다.
그리고 최양업 신부는 서품 직후인 1849년 5월부터 7개월 동안 차쿠·양관을 중심으로 중국인 사목을 담당하였다.
따라서 이 지역은 최양업 신부가 한국인 성직자로서는 처음으로 사목했던 중국 안의 한국 사적지라 할 수 있다.
그 후 1866년의 병인박해 때 조선을 탈출한 리델(李福明 펠릭스) 신부는 1869년 1월에 조선 선교사 칼래(姜 알퐁소), 블랑(白圭三, 요한), 리샤르(蔡 베드로), 마르티노(南 알렉산델) 신부 등과 함께 차쿠를 조선 입국의 거점으로 삼고자 하였다. 이에 만주교구장 베롤 주교와 협의하여 「차쿠~양관」지역의 재치권(jurisdictio)을 부여받고, 재산 양도 계약서까지 작성하였다.
그 결과 이 지역은 조선교구의 임시사목 관할 지역이 되었으며, 조선 선교사들은 1869년 10월에 이곳에서 제2차 조선교구 성직자 회의(1차는 1857년 서울에서 개최됨)를 개최하였다. 리델 신부는 그 해 제6대 조선교구장에 임명되었다.
조선 선교사들은 차쿠 성당의 이름을 로마에 있는 「눈의 성모 성당」(聖母雪之殿, Notre Dame des Neiges)과 동일한 이름으로 붙인 다음 축성식을 가졌다. 아울러 리델 주교는 이곳에 조선교구 대표부를 설치하고 조선 신학교를 설립하였으며, 리샤르 신부를 차쿠 본당의 주임 신부 겸 조선교구 대표로 임명하였다.
이때 마르티노 신부는 양관 본당의 주임으로 임명되었던 것 같다. 아울러 한국인 요셉과 도미니코가 이곳 신학교에서 공부하다가 1876년에 귀국하였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조선 선교사들에 의한 요동 사목은 1880년에 리샤르 신부가 사망하고, 1881년에 조선교구의 대표부가 나가사키로 이전되면서 끝나게 되었다.
가장 많이 본 기사
기획연재물
- 길 위의 목자 양업, 다시 부치는 편지최양업 신부가 생전에 쓴 각종 서한을 중심으로 그가 길 위에서 만난 사람들과 사목 현장에서 겪은 사건들과 관련 성지를 돌아본다.
- 다시 돌아가도 이 길을한국교회 원로 주교들이 풀어가는 삶과 신앙 이야기
- 김도현 신부의 과학으로 하느님 알기양자물리학, 빅뱅 우주론, 네트워크 과학 등 현대 과학의 핵심 내용을 적용해 신앙을 이야기.
- 정희완 신부의 신학서원어렵게만 느껴지는 신학을 가톨릭문화와 신학연구소 소장 정희완 신부가 쉽게 풀이
- 우리 곁의 교회 박물관 산책서울대교구 성미술 담당 정웅모 에밀리오 신부가 전국 각 교구의 박물관을 직접 찾아가 깊이 잇는 글과 다양한 사진으로 전하는 이야기
- 전례와 상식으로 풀어보는 교회음악성 베네딕도 수도회 왜관수도원의 교회음악 전문가 이장규 아타나시오 신부와 교회음악의 세계로 들어가 봅니다.
- 홍성남 신부의 톡 쏘는 영성명쾌하고 논리적인 글을 통해 올바른 신앙생활에 도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