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반도의 북쪽 끝 회령에서 자유를 찾아 한국에 온 새터민 조현우(가명)씨가 발 디딘 해남 땅끝마을. 너무도 멀리 돌아돌아 남쪽 땅 끝에 선 그의 감회는 남다르다.
교구 민화위가 8월 16일부터 4일간 전남 해남 일원에서 마련한 ‘2010 새터민 여름여행’에 참가한 조씨의 소감문을 싣는다.
회령에서 해남까지, 한라에서 백두까지, 먼 길 돌지 않고 누구나 발 디딜 수 있는 통일의 날이 오기를 조씨와 함께 기원한다.
오늘은 웬일인지 가슴이 설렙니다. 수원교구 민화위에서 신자, 예비신자 여름여행을 가는 날입니다. 가장 북쪽 회령이 고향인 내가 남쪽의 땅 끝까지 가볼 수 있다고 생각하니 어쩐지 마음이 두근거리고 지난 시간들의 기억으로 한편으로는 가슴이 아픕니다.
얼마나 많은 고통과 슬픔들이…. 대한민국에 친척이 있다는 이유로 개성시에서 살다가 추운 북쪽으로 추방되었고, 열심히 성실하게 살았지만 그림자처럼 따라다니는 출신성분 때문에 기가 죽어 살아야 했고, 부모?형제?자식의 웃음까지도 빼앗기며 살아야 했던 지옥 같은 감옥 생활을 했던 것입니다.
가장 귀중하고 소중한 모든 것을 다 잃어버린 다음에야 말로만 누구나 평등하게 잘 살 수 있는 사회주의의 땅에 환멸을 느끼고 눈물의 강, 두만강을 건너 반겨 맞아주는 친척 하나 없는 낯설은 중국 땅에서 허허벌판에 홀로 남아있는 쓸쓸하고도 외로운 고독감에 시달려야 했습니다. 언제 북송될지 모르는 두려움과 공포에 시달리는 숨바꼭질 같은 인생을 살았습니다. 언제나 불덩이를 안고 사는 심정으로 12년 동안이나 살아왔습니다.
하지만 쥐구멍에도 해뜰 날이 있다고 전능하신 아버지인 하느님은 저를 버리신 것이 아니었고, 따뜻한 그 품에서 사랑을 누리며 살 수 있도록 은총을 베풀어 주셨고, 언제나 주님의 안에서 살 수 있도록 해 주셨습니다. 커가는 자식 앞에 떳떳하고 싶었고, 두 번 다시 소중한 나의 모든 것을 잃고 싶지 않았기에 무더운 태국 땅에서 바퀴벌레가 기어 다니는 악취풍기는 그곳에서 한국으로 갈 수 있다는 희망으로 기다림에 지치면서도 버티어 냈던 것입니다.
병들고 지친 몸으로 왔건만 아무런 내색 없이 따뜻이 보듬어 주는 대한민국 정부와 생소한 한국 땅에 정착을 잘하도록 이모저모 생각해주시는 신부님, 수녀님, 많은 분들을 대할 때면 고마운 마음에 저절로 머리가 숙여지고 강한 모습으로 그분들의 기대에 좋은 모습만 보여주고 싶습니다.
땅끝전망대에 올라 끝없이 펼쳐진 망망한 대해와 안개 속에서 희미하게 보이는 섬들과 등대들을 바라보면서 이게 혹시 꿈인가 싶어 손으로 허벅지를 꼬집어봤습니다. 버림받고 상처투성인 이 마음에 기쁨과 희망에 넘친 웃음을 주고 이젠 나도 당당히 조국이라 부를 수 있는 대한민국의 어엿한 국민이 되었고, 나 자신과 내 자식을 위하여 웃으면서 살 수 있다고 생각하니 마음이 설레고 그 멀고도 긴 여정 속에서 죽음의 문을 오가면서 기다림에 지쳐 버렸던 그때를 생각하니 황홀한 꿈처럼 생각되어집니다.
한 가지 아쉬운 점이 있다면 저의 어머님과 함께 이곳에 함께 올 수 없음이…. 하늘나라로 가신 우리 아버지도 기뻐하셨을 텐데라는 것입니다. 부모, 형제가 그리워 몸부림을 치는 그 심정을 헤아려 비록 피는 다르지만 친 혈육이 되어주려고 애쓰시며 이모저모 부족한 저희들에게 사랑의 손길을 보내주면서 서로가 보듬으면서 살 수 있도록 삶의 이정표가 되어주시는 하느님에 대하여 알게 되면서 나는 결코 외롭지 않으며 많은 분들의 기대와 관심 속에서 저를 지켜보신다는 생각만으로도 마음이 벅차고 삶에 대한 자부심과 희열을 느끼게 됩니다.
서로 다른 체제에서 살다보니 이 사회에 적응하는데 많은 애로와 난관이 있겠지만 주는 밥만 받아먹는 식충이 되지 말고 나도 무엇인가 남을 위하여 할 수 있다는 신심을 가지고 열심히 성실하게 살며 제 자식을 대한민국에 필요한 인재로 키우는 것이 제가 마땅히 해야 할 일이며 어렵고 힘들 때마다 죽음을 각오하고 대한민국으로 오려고 했던 그때를 생각하면 못해낼 일이 없으리라고 생각합니다.
높이 솟아 있는 땅끝전망대에 올라 끝이 보이지 않게 펼쳐진 푸른 바다를 바라보면서 나와 내 자식은 이 땅에서 남들처럼 웃으면서 바다와 한 약속대로 내 자식과 함께 10년 후의 새롭게 변한 모습으로 다시 이 전망대에 오를 것입니다.
10월 1일 딸과 함께 세례를 받게 됩니다. 새터민들에게 더 인간답게 신앙안에서 살도록 하느님께 이끌어 주시는 신부님께 감사드리면서 가난하지만 나누며 살 것을 다짐해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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