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태호 국무총리 후보자가 8월 29일 오전 자진사퇴했다. 국정 2인자를 꿈꾸던 가난한 소장수 아들의 화려한 비상은 21일 만에 끝나고 말았다.
8·8개각에서 ‘40대 총리’로 관심을 모은 김 후보자는 “가난한 소장수 아들로 태어났다”며 “20·30대 젊은이들에게 아무 배경 없는 촌놈, 서민출신도 기회를 가질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려는 의미가 있다”고 자신을 소개했다. 하지만 친서민을 강조했던 그는 청문회가 시작되자 각종 의혹과 잇단 말 바꾸기 등으로 여론의 지탄을 받았다.
사퇴의사를 밝히고 서울 광화문 개인 사무실에서 가진 기자회견에서 김 후보자는 “청문회 동안 제 부족함이 너무나 많음을 진심으로 깨우쳤다”며 “각종 의혹에 대해서는 억울한 면도 있지만 모든 것은 제 부덕의 소치”라고도 말했다. 그는 또 “국민의 믿음이 없으면, 신뢰가 없으면 제가 총리직에 임명된다 해도 무슨 일을 앞으로 할 수 있겠느냐”며 사퇴 배경을 설명했다.
김 후보자에 이어 신재민 문화체육관광부, 이재훈 지식경제부 장관 후보자도 사퇴의사를 밝혔다. 이로써 정부가 ‘쇄신’과 ‘공정한 사회 구현’을 강조하며 발표한 8·8개각은 사실상 실패로 평가된다. 하지만 정치적인 문제보다 더 큰 문제는 청문회를 통해 드러난 한국정치사회에 팽배한 비도덕성, 비윤리성이다.
한국 정치사회의 축소판, 인사청문회
이번 청문회는 한마디로 ‘죄송 청문회’ ‘사과 청문회’였다. 청문회 내내 “불찰이었다” “뉘우치고 있다” “실수였다” 등 후보자들의 사과발언이 이어졌다.
김태호 국무총리 후보자는 12차례, 신재민 문화체육관광부 장관 후보자도 14차례의 사과발언을 했을 정도다. 특히 조현오 경찰청장 후보자는 27차례나 사과발언을 해 후보자들 중에서도 단연 압권이다. 사과발언이 무색하게도 의혹을 해소시킬만한 시원한 답변은 한 번도 나오지 않았다. 그저 머리를 조아리며 상황을 넘기려는 모습만 반복됐다.
후보자들의 모습은 “깨끗하고 청렴한 공직상을 정립하기 위한 도덕성 높은 인사들”이라고 한 청와대의 평가와는 달라도 너무 달랐다. 도청 직원의 가사도우미 활용, 부인의 관용차 전용, 재산누락은 물론 5차례의 위장전입, 부인 위장취업, 부동산 투기와 양도세 탈루 의혹 등 도덕성 문제와 범법 행위가 끊임없이 재기됐다.
심지어는 고위 공직자가 해서는 안 될 기준 ‘4+1’(위장전입, 병역기피, 세금탈루, 부동산투기, 논문표절)까지 언급됐을 정도다. 국민들에게는 하지 말라고 법으로 제정해 놓은 것들을 정치인, 고위 공직자들이 몸소 어겼던 것이다.
결국 국민들의 불신과 불만이 터져 나왔고, 김태호 국무총리 후보자를 비롯한 장관 후보자들의 사퇴로 이어졌다. 또한 도덕성이 결여된 인사를 내정한 청와대의 인사검증에 대한 국민 신뢰도도 더불어 추락하게 됐다.
박정우 주교회의 정의평화위원회 총무 신부는 “도덕성은 모든 이들에게 기본적인 문제이지만 현재 정부에서 고위 공직자들을 선정하는 것을 보면 문제가 있다”며 “기본적으로 도덕적 결함이 분명히 드러났음에도 불구하고 인사를 단행하려고 했기 때문에 이번 사태는 당연한 일”이라고 설명했다.
박 신부는 또 “정치인, 공직자 등 정치공동체는 국민을 위해 봉사하는 공동체로, 섬기는 자세를 가져야 한다”며 “특정 집단이 아닌 모든 사람들이 자기의 완성을 이룰 수 있도록, 즉 공동선이 실현될 수 있도록 환경을 마련해야한다”고 전했다.
흠집투성이인 8·8개각 인사 청문회는 우리나라 정치사회상의 축소판이었다. 정치, 경제, 사회, 문화 등 사회 전반에 공정하지 못한 관행이 여전히 많이 남아있음을 그대로 보여줬다. 그 중에서도 도덕성이 결여된 정치인, 공직자들은 심각한 문제로 대두됐다. 실제로 이번 청문회에서 언급된 이들 외에도 스폰서 검사, 민간인 사찰 공직자 등의 뉴스를 쉽게 접할 수 있었다.
국민들이 고위 공직자에게 도덕성을 요구하는 것은 그만큼 우리사회에 도덕성이 결여돼 있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이는 온라인 취업포털 사람인(www.saramin.co.kr)이 자사회원 성인남녀 1100명을 대상으로 한 설문조사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대한민국의 사회 지도층을 비롯한 공인을 신뢰하는 편입니까’라는 질문에 84.3%가 ‘신뢰하지 않는다’고 응답했을 정도다.
사회정의시민행동 의정활동평가위원장 이정희(베드로·한국외대 정치외교학과) 교수는 “우리사회가 압축 성장을 해오고 민주화 과정에서 어려움을 겪으면서 국민의 기대나 수준에 비해 민주화가 덜된 것이 사실”이라며 “공직자 의식이나 정치권의 도덕성도 떨어져 있으며, 청와대의 낮은 인사검증 기준을 증명하는 계기가 됐다”고 말했다. 이 교수는 아울러 “이번 김태호 총리 후보자를 비롯한 장관 후보자들의 사퇴를 통해서 도덕성에 대해 수준이 높아져야 할 것”이라고 강조했다.
일각에서는 이런 원인을 급격한 경제성장으로 인한 물질만능주의와 권력권자의 부정부패에서 찾는다. 하지만 도덕성이 경제성장에 가려져 무시되는 시대는 지났다. 국민들이 정치인들에게 높은 도덕적 수준을 바라는 것은 아니다. 적어도 최소한의 도덕성을 갖춘 정치인, 고위 공직자들을 기대할 뿐이다.
정치공동체에 대한 교회 가르침
가톨릭교회는 정치공동체는 공동선을 위해 존재하고, 공동선 안에서 완전한 자기 정당화와 의미를 얻고, 공동선에서 본래의 고유한 자기 권리를 이끌어 낸다고 정의한다(사목헌장 74항). 이를 바탕으로 정치 권위는 도덕률을 따라야 한다고 가르친다. 권위가 지닌 모든 존엄은 도덕 질서 안에서 행사되고, 그 질서의 첫 번째 원리와 궁극적 목표는 ‘하느님’이라고 설명한다(간추린 사회교리 396장).
또한 도덕적 정당성을 부여할 수 있는 권위의 힘은 독단적인 의지나 권력욕에서 비롯되는 것이 아니며(간추린 사회교리 396항), 도덕 질서를 무시한 정치 권위는 정당성을 잃게 되며, 국민은 양심에 비추어 공권력을 거부해야할 의무도 있다고 가르친다(간추린 사회 교리 399항).
교회는 도덕성 결여에 대한 언급을 하고 있다. 간추린 사회교리 411항에 따르면 “민주주의 제도의 가장 심각한 결함 가운데 하나는 도덕 원칙과 사회 정의 규범을 한꺼번에 짓밟는 정치적인 부패다”며 “이는 공공 기관에 대한 불신을 증대시키고, 차츰 정치와 정치인들에 대한 국민들의 불만을 야기한다”고 설명했다. 이어 “정치적 선택에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 사람들의 편협한 목표에 부합되는 정치적 선택이 이뤄지게 되고, 이는 모든 국민의 공동선 달성에 걸림돌이 된다”고 했다.
정치공동체는 결국 정치적 대표성의 도덕적 차원을 망각하거나 과소평과해서는 안 된다는 의미다. 즉, 책임있는 권위는 권위, 명예나 사사로운 이익이 아니라 봉사의 정신으로 권력을 행사할 수 있게 하는 덕목들(인내, 겸손, 온건, 애덕, 함께하려는 노력)에 따라 공동선을 활동의 참된 목표로 받아들일 수 있는 사람들이 행사하는 권위라는 것이다(간추린 사회교리 410항).
하지만 정치공동체에 무엇보다 강조하는 것은 예수의 말씀이다.
“저희 가운데에서 높은 사람이 되려는 이는 너희를 섬기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또한 너희 가운데에서 첫째가 되려는 이는 너희의 종이 되어야 한다. 사람의 아들도 섬김을 받으러 온 것이 아니라 섬기러 왔고 또 많은 이들의 몸값으로 자기 목숨을 바치러 왔다”(마태 20,26-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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