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렇게 하느님께서는 모든 것을 새로 지으시고 이렛날에는 쉬시고 이날을 거룩한 날로 정하시오 복을 주셨다』(창세 2,3)
최근에 유행하는 용어로서 바이오리듬, 생체리듬이란 말이 있다. 인간의 생명활동에서 신체, 감성, 지성 등에 주기적으로 나타나는 일정한 현상을 말함이다. 인간의 생활은 모든 것이 주기적인 반복임을 알 수 있다. 시간 단위가 모여서 하루가 되고 하루하루를 모아서 주간으로 묶었으며 주간 단위가 모여서 한달이 되고 열두달을 묶어서 1년이란 큰 단위가 생겨나게 되었다. 그런데 그 단위안에서 자신의 시간표를 만들었던 최초의 노동자가 바로 하느님이시다!
이 세상을 태어나게 하시고 하루 하루 모든 존재를 창조해 나간 6일 간의 위대한 노동을 끝내시고 이렛날에는 쉬셨다. 그리고 그 쉬는 날을 거룩한 날로 정하시어 축복하셨다. 그러니까 이 마지막 쉬는 날도 하느님의 창조행위로서 하느님의 마지막 창조작품이라 한다면 어폐가 있을까? 다시 말해 쉬는 날을 창조하셧다는 말이다. 그러니 하느님도 이렇게 엿새 일하시고 하루는 쉬셨으니 인간들도 그런 주기로 생활해야하는 것이 아니냐고 성서저자는 묻고있는 것이다.
그러면 성서저자의 의도를 살펴보자. 지난번에 언급했듯이 창세기 1,1~2,4 까지의 이야기는 사제계 학파의 저술이다. 그리고 창조설화가 쓰여진 시기는 B.C. 586~538년 그러니까 바빌론 유배시기이며 이때는 이미 이스라엘 백성들 사이에 율법이 제도화 되어 있었다. 이 하느님의 백성이 지켜야 할 중요한 계명이 안식일 법이었으니 『너희는 엿새동안 일하고 이렛날은 너희가 거룩히 지내야 할 날 곧 야훼를 위하여 푹 쉬는 안식일이니, 그날 일하는 자는 누구든지 사형에 처하여야 한다. 안식일에는 너희가 사는 곳 어디에서나 불도 피우지 못한다』(출애 35,1~3)
출애굽사건과 모세의 활동은 B.C. 1300년 경이다. 그로부터 800년 가까이 세월이 흐르는 동안 이 안식일 계명은 흐려져서 하느님 백성이 이것을 잘 지키지 않게 되었다.
『나의 거룩한 날에 돈벌이 하느라고 안식을을 짓밟지 말아라. 안식일은 기쁜 날. 야훼께 바친 귀한 날이라 불러라』(이사 58,13)
『그때 유다에서는 안식일인데도 술을 빗고 나귀에 곡식단을 실어들이고 포도주, 무화과 같은 것을 예루살렘으로 날라 들였다. 나는 이것을 보고 이같은 날에 양식을 팔고 사다니 안될 일이라고 야단쳤다』(느헤 13,15)
그러니까 안식일 법은 이 창조설화가 쓰여지기 이전에 이미 있었던 것이다. 안식일법을 더 잘 확실하게 지키도록 가르칠 방도로, 교리교육의 목적으로 사제들이 이 창조설화를 만든 셈이다. .백성들이 모쪼록 하느님을 잊지않고 계명을 잘 준수하도록 가르치는 것이 사제의 임무가 아닌가. 성서안에서의 7이라는 숫자는 완전, 완성을 뜻하며 히브리 백성들사이에 널리 알려져 있었다.
우리 민족이 옛부터 9라는 숫자를 좋아하듯이…. 그리하여 성서저자는 6-1이라는 도식으로 하느님의 위대한 노동과 쉼을 설명하면서 하느님도 이렛날은 쉬셨는데 하물며 우리 인간이 쉬지 않아서야 되겠느냐 학 하느님 백성들을 가르치고 있다. 그 후로 이 교육이 효과가 있었던지 예수시대에는 오히려 지나친 안식일 준수로 인하여 예수께서는 『안식일이 사람을 위하여 있는 것이지 사람이 안식일을 위하여 있는 것이 아니다』(마르 3,27)고 까지 말씀하시게 될 정도였다. 신약에 와서는 주님 부활을 기념하는 매주 일요일을 구약의 안식일과 같은 의미로 지내고 있다. 그런데 안식일의 사람을 위하여 있는 것이라는 예수님 말씀의 근본의도가 오늘날 다시금 변질되고 퇴색되고 있는 듯하다. 그래서 최근에 요한 바오로 2세께서 「주님의 날」리나는 교서를 발표하셨다.
『주님의 날은 특별히 인간이 모든 피조물의 목소리가 되어 하느님께 찬미의 노래를 드리며 이러한 관계를 맺는 날입니다. 이것이 바로 주님의 날이 휴시그이 날이기도 한 이유입니다… 하느님께서 손수하신 「참좋은」일을 이리저리 둘러보시며 기쁨과 환희에찬 시선을 보내시는 것입니다. 이것은 앞으로 하여야 할 일을 잠시 접어두고 이루어 놓은 일의 아름다움을 즐기는 관조적인 시선입니다. (주님의 날 15항, 11항)
교황님 말씀을 새겨 읽으니 그 뜻이 그렇게 아름다울 수가 없다. 주님의 날은 날중의 날, 새로운 창조의 날, 빛이신 그리스도의날, 성령을 선물로 주신 날, 신앙의 날, 우리에게 반드시 필요한 날, 인간의 날로서 하느님의 창조사업과 「부활」이라는 새 창조사업을 기리는 주일은 특별히 기쁨의 날이라고 강조하고 있다. 이 기쁘고도 거룩한 주일의 의미를 외면하고 지나친 사치와 향락의 시간으로 채우는 사람들에게나 열악한 노동환경으로 휴식을 가질 수 없는 이들을 위하여서도 주님의 날의 의미와 가치와 권리가 되찾아져야 하겠다. 이렇게 하지 않으면 인간은 결국 생산하고 소비하는 기계나 짐승처럼 전락하게 된다. 인간이 인간됨의 품위와 우리 존재의 확실성을 확인하는 날로서 감사와 창미를 비치며 자기의 삶과 행동에 균형과 눙심을 주는 닐인 감사와 창미를 바치며 자기의 삶과 활동에 규형과 중심을 주는 날인 인식일의 입법자이신 하느님은 친미받으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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