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들 외에 특별한 신심을 보인 이들은 하시딤이라고 일컬어지는 경건자들이다. 이들은 조직적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하스모네 가문(BC 163년 이후)이 독립전쟁에 승리하여 민족의 긍지를 살린 것은 다행스러운 일이었으나 과욕을 부려 정권과 대사제직을 독식한 것은 큰 잘못이었다. 마띠이아의 넷째 아들 요나단(BD160-143 통치)은 독립군 사령관으로 만족하지 않고 대대로 대사제직을 배출한 사독 가문을 제치고 BC 152년 대사제 직분까지 겸직하게 되었다.
일이 이렇게 되자 그때까지 독립군에 가담했던 경건자들이 양분되기에 이르렀다. 요나단을 지지하던 경건자들은 바리사이파를 만들고, 그를 반대하면 경건자들은 에쎄네파를 만들었다.
바리사이파는 경건한 평신도들로서 구약성서 안에 있는 규정은 물론이고 조상들이 구전으로 전해주던 전통까지도 존중하고 철저하게 지키던 사람들로서 「분리된 자들」이라는 뜻이다. 율법과 전통을 지키지 않던 사람들과는 분리되었던 것이다. 이들의 특색은 레위적 정결을 엄수하는 데 있었다. 그러므로 그들은 「율법도 모르는 무리 같은」(참조·요한 7,49) 일반 대중들로부터 『분리된 자들』일 수밖에 없었다. 그들은 하느님의 섭리, 천사들, 후세에서의 보상, 죽은이들의 부활을 믿었다. 유대 역사가 요세푸스의 기록에 의하면 헤로데 왕 치세 때 바리사이들은 6천명이 넘었다고 한다. 그들은 엄격한 율법 준수를 통하여 의를 얻는다고 보고 율법 준수에 충실하였으나 점차적으로 그 실천이 형식적 순결을 중시하는 것으로 나타나 본래의 목적에서 빗나가는 위선에 빠지기도 하여 후대에 이르러 세례자 요한과 예수님으로부터 비난을 받았다.
쿰란을 중심으로 모여 수도생활을 하던 에쎄네파의 출현을 이러하다. BC 152년 요나단이 대사제직을 찬탈하고 그의 조카 요한네스 히르따누스가 통치할 무렵(BC 135-104) 의로운 스승 또는 그의 후계자가 추종자들을 데리고 사해 서북쪽에 있는 쿰란으로 가서 수도 공동체를 세우고 수도에 힘썼다. 이 수도원은 알렉산드로스 얀네우스 치세(BC 103-76)때 매우 번창했으나, AD86년 6월 로마군에 의해 파괴되었다. 쿰란의 수도자들은 사악한 대사제들이 봉직하는 예루살렘 성전이 더럽혀졌다고 보았으며 사막에 살면서 하나의 신앙으로 맺어져 있었다. 그 공동체는 사제들과 레위인들로 구성된 엘리트 계층의 교회였다고 볼 수 있다. 그들은 빛의 아들들과 어둠의 아들들 사이에 종말전쟁이 일어난다고 보았고, 결국 빛의 아들들이 승리하여 다윗 계통의 임금인 메시아와 사독 계통의 대사제 메시아가 이스라엘의 12지파를 다스릴 것이라고 믿었다. 그들은 대사제들이 지키던 정결 예식을 철저히 준수하였고 육체의 불결을 피하려고 독신생활을 하였으며 시편 42,4의 정신처럼 공동체 안에서 신적인 질서를 확실히 깨달아 마지막 시대를 준비하는 자들로서 자기들의 삶을 제물로 봉헌하기 위한 마음의 관대함을 누리는 사람들로 여기고 있었다. 빛의 아들들의 규칙에는 쿰란의 사제들이 비록 예루살렘의 동료 사제들과 같은 길을 가지 않았지만 그들의 제물 봉헌만은 받아들인 것으로 나타나 있다. 그들은 하느님이 즐겨 받으실 향기로운 저녁 제사에 참여할 수 있다는 믿음을 가지고 있었다. 그들은 예언자들이 이미 예견한 것처럼 지지하게 수덕에 힘썼다. 그들은 비록 의식적인 제사를 거부하지 않았으나 예루살렘의 기존 사제들과는 분명이 다른 구별된 삶의 양식을 지킨 사람들이었으며 야훼의 법에 충실한(시편 1,1-6 37, 31 119, 34-35) 사제와 수도자들이었다.
사두가이파들은 문화적으로는 헬레니즘을 장려하고 세속적이었으며 하스모네 광가와 로마의 식민 정권과 결탁하였다. 이들은 종교적으로는 보수적인 태도를 취하여 예언서들의 영감을 거부하고 구전된 율법을 배척하였으며 오직 모세 5경만을 성서로 인정하였다. 또한 이들은 천사들의 존재와 부활을 부정하고 영혼불멸과 하느님의 섭리도 인정하지 않았다. 이들은 기원후 70년 예루살렘이 멸망할 때 사라졌다.
그러나 무식한 시골 사람들은 위에 소개한 어느 부류에도 속하지 않고 십일조법, 정결법, 기도법 등을 소홀히 했다. 그들은 「율법도 모르는 무리」(참조. 요한 7,49)였다.
영성생활에 있어서 가난의 정신은 대단히 중요하다. 남의 도움을 받지 않으면 극빈자들이며 경제적으로 넉넉하지 못한 이들은 가난한 사람들이다. 그리고 물질적으로 빈궁하지 않은 사람이라도 전능하시고 완전하신 하느님 앞에 자신을 드러내 보일 때 자신의 비참과 부족함을 실감하지 않을 수 없다.
이런 사람도 정신적으로 가난한 사람이며 자신이 구원되기 위해서는 하느님의 도우심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는 것을 느끼는 사람 역시 가난한 사람이다. 자신의 영적 빈존을 아는 사람은 만민이 구원되기를 워하시는 하느님께 자신의 전존재를 맡긴다. 오직 하느님만이 구원자이시기 때문이다. 이런 의미에서 성서에서는 야훼의 가난한 이들을 특별히 옹호하며 수덕에 힘쓴 이들의 정신을 결코 무시할 수 없을 것이다.
성서에서 과부, 고아, 이민자들은 물질적으로 버림받은 불쌍한 이들이다. 이 작은 무리는 빈곤과 비참, 착취의 희생물이다. 가나안 정착과 왕정시대 그리고 유배 이후에 가난한 이들은 소외된 자들로서 그들의 삶은 윤리적이고 영성적인 의미로 발전하였다. 그들은 사마리아인들과 외국인들 앞에서 스스로가 소외된 자들과 가난한 백성이라는 의식을 갖게 되었다. 그들은 분명히 착취자들인 부자들과 하느님을 모독한 불뎡자들과 분리되었다. 가난한 사람은 전능하신 하느님께만 희망을 두고 신뢰하는 이들이다. 그들은 선조들이 그러했듯이 야훼만이 자기들의 해방자와 유일한 왕으로서 자기들을 보호하고 방어하실 분이라는 믿음을 가지게 되었다. 이런 맥락에서 자신을 가난한 자로 여기는 이들은 복된 가난을 체험하며 살아가는 이들로서 그 근원을 야훼의 가난한 사람들에 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