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시인협회, 가톨릭문인회 회원인 박해림(아녜스)씨의 시집. 시인은 「넉넉한 품새로」모양좋게 마련한 이불이 어느새 「쭈글쭈글한 밉상」이 된 것을 안타까워하며 이불 호청의 「실밥을 뜯는다」.
실밥을 뜯는다는 것은 곧 구겨진 일상으로부터의 탈출을 꿈꾸는 행위. 시 쓰기가 삶을 구속하고 있는 사슬을 벗겨내려는 의식일 수 있다면, 이 책 「실밥을 뜯으며」에 실린 시들 역시 거기에 해당한다.
삶을 살아가는 것이 아닌 「살아내는」이들에게 일상은 무던히 질긴 사슬이자 포승이다. 더구나 이부자리를 개는 새벽부터 다시 잠자리에 드는 순간까지 시부모와 남편, 그리고 자식들까지 거두어야 하는 아내의 자리에 서면 어느 것 하나 수월한 일상으로 접어둘만한 사소한 것이 없다.
가족과 인연, 규범과 의무, 본분과 책임, 밥벌이와 살림살이로 이어지는 모든 구렐가 긴장으로 팽팽하게 사슬이 된다.
박해림의 시집 「실밥을 뜯으며」에서 『풀어낸다』는 의식이 유난히 많은 까닭도 이와 무관하지 않다. 일상을 얽는 구속들을 풀어내려는 그녀의 욕구는 맞닥뜨리는 사물들의 왜곡이 강할수록 더욱 강렬하게 촉발되고 있다.
「말간 정신 초록의 시간들」로 채워진 젊은 날의 꿈들은 「깊이를 알 수 없는 속앓이」로 어느새 「어둠의 씨」로 변하고, 최색된 솜덩어리로 뭉쳐지고 말았다. 이에 시인은 어떨 수 없이 흘러간은 세월과 시간, 늙음에 대한 안타까움을 이불 호청의 「실밥을 뜯는」일로 환유하고 있는 것이다.
구겨진 일상은 오래 참아내고 묻어버릴수록 깊은 상처를 남기는 것. 시인은 그 상처를 수긍하고 극복하기 위해 『오래 묵은 어둠의 씨를 오늘 햇살 좋은 가을 한가운데 바싹 말려야겠다』며 새로운 앞날을 바라보고자 하는 각성을 다짐한다.
<문학수첩/118쪽/50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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