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에는 화려한 주연도 있지만 고마운 조연도 있습니다. 그리고 고마운 조연들이 있어 세상은 훈훈합니다. 우리의 삶도 마찬가지입니다. 삶에는 영광의 순간도 있지만 어두운 구석도 있습니다. 그리고 어두운 구석이 있어 삶을 성찰케 합니다.
나아만이라는 장수가 있었습니다. 그는 힘센 용사였으나 나병 환자였습니다. 그런데 그에게 잡혀온 이스라엘 소녀가 사마리아에 있는 예언자를 소개해줍니다. 나아만은 군마와 병거를 거느리고 엘리사에게로 갑니다. 그런데 엘리사는 심부름꾼을 시켜 요르단 강에서 일곱 번 몸을 씻으라고 합니다. 나아만은 그가 일러준 대로 몸을 씻었고, 새살이 돋아 깨끗해졌습니다. 그리고 엘리사에게로 되돌아가 주님께 신앙고백을 했습니다.
“이제 저는 알았습니다. 온 세상에서 이스라엘 밖에는 하느님께서 계시지 않습니다.”(2열왕 5,15)
만일 그가 나병에 걸리지 않았다면 하느님을 만날 수 있었겠습니까? 그가 잘나가기만 했다면 하느님을 찾지 않았을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 나오는 나병 환자 열 사람도 마찬가지입니다. 만일 그들이 나병에 걸리지 않았다면 예수님을 찾았겠습니까? 그들도 나병이라는 삶의 어두운 구석이 있었기에 예수님을 찾을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으로 인해 깨끗이 나을 수 있었습니다.
‘나병 환자 열 사람’을 주제로 성화를 그린 사람은 그리 많지 않습니다. 그 중에서 19세기 프랑스 화가인 제임스 티솟(James Tissot, 1836∼1902)의 그림만 이름이 남았을 뿐이고, 나머지는 작자 미상입니다.
제임스 티솟은 1836년에 프랑스 낭트에서 태어나 스물세 살에 화가로서 첫 번째 전시회를 했고, 서른네 살에 프랑스 프로이센 전쟁에 참전했습니다. 전쟁이 끝난 후 그는 런던으로 갔고, 마흔 살에 런던에서 캐서린 뉴턴과 동거했습니다. 그러나 그녀는 6년 만에 숨졌고, 모든 것을 잃은 뒤에야 그는 심령주의에 빠져 예수님의 생애와 구약성경을 주제로 700여 점의 성화를 그렸습니다. 그리고 예순 살에 런던에서 예수님의 생애 350점을 전시했고, 노년에는 예수님의 고향인 예루살렘을 순례했으며, 예순여섯 살에 프랑스 두(Doubs)지방의 비용수도원에서 숨을 거두었습니다.
만일 그가 전쟁을 겪지 않고 사랑하는 사람과 사별하지 않았다면 성화를 그렸겠습니까? 전쟁과 사별이라는 어두운 구석이 그를 신앙으로 되돌리게 했습니다.
그가 그린 ‘나병 환자 열 사람’의 그림을 보면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어떤 마을에 들어가고 계셨습니다. 그런데 나병 환자 열 사람이 멀찍이에서 어떤 이는 팔을 들고, 어떤 이는 손을 모아 애원합니다. “예수님, 스승님! 저희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루카 17,13)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뒤돌아서서 한 손을 들어 이르셨습니다. “가서 사제들에게 너희 몸을 보여라.”(루카 17,14) 그들은 가는 도중에 몸이 깨끗해졌습니다. 그러나 그들 가운데 병이 나은 것을 보고 예수님께 돌아와 하느님을 찬양하며 감사한 사람은 한 사람밖에 없었습니다. 그는 사마리아 사람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림에는 나병 환자 열 사람 중에서 무릎 꿇어 하느님을 찬양하는 사람이 한 사람뿐입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열 사람이 깨끗해지지 않았느냐? 그런데 아홉은 어디에 있느냐? 이 외국인 말고는 아무도 하느님께 영광을 드리러 돌아오지 않았단 말이냐?”(루카 17,17-18)
감사는 무릎을 꿇는 사람만이 할 수 있고, 겸손한 사람만이 할 수 있습니다. 감사할 줄 모르는 사람은 교만한 사람입니다. 예수님께서 겸손하게 감사하는 사람을 일으켜 세우며 말씀하셨습니다. “일어나 가거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루카 17,19) 받은 은혜에 감사하는 것은 새로운 은혜를 더 풍성히 가져오게 합니다. 그런데도 우리는 아직도 감사할 줄 모르는 아홉은 아닙니까?
위대하지는 않지만 고마운 조연들이 있어 아름다운 세상입니다. 화려하지는 않지만 성찰하는 사람들이 있어 행복한 세상입니다. 받은 은혜는 많지 않지만 감사하는 사람이 있어 풍요로운 세상입니다.
말씀 안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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