혹독한 고문에도 목숨 대신 신앙을 선택했던 이선이(엘리사벳)의 순교 150주년을 맞아 9월 30일 오전 10시30분 그의 유해가 묻힌 신나무골 성지(경북 칠곡군 지천면 연화리)에서 기념미사가 거행됐다.
신나무골 성지를 관할하는 대구대교구 신동본당을 비롯해 가실·석전·약목·왜관본당 등 왜관지역 5개 본당이 공동 주최한 이날 미사는 대구대교구장 직무대행 조환길 주교 주례로 성 베네딕도회 왜관수도원장 이형우 아빠스 등 대구대교구와 왜관수도원 사제단이 공동 집전했다. 특히 이날 미사는 3000여 명의 교구민들이 참례해 순교자의 삶을 따라 살아갈 것을 다짐하는 뜻 깊은 시간이었다. 미사 후에는 서경윤 신동본당 주임 신부의 이선이 순교약사 소개, 묘소 참배 등이 이어졌다.
조환길 주교는 이날 미사 강론을 통해 “순교란 목숨으로 하느님께서 가르쳐 주신 진리를 ‘증언’하는 것으로, 신앙에 대한 확신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라며, “믿지 않는 이들에게 당당히 신앙을 증언하는 것은 지금 우리가 순교자의 후손으로서 실천할 수 있는 자세이며, 하느님께로 나아가는 천상영복의 길”이라고 말했다.
조 주교는 또 미사 후 기념사에서 “대구대교구 설정 100주년을 맞아 교구 발전의 기틀을 마련해 준 선배 신앙인들을 기리는 것은 정말 큰 의미가 있다”며, “목숨으로 신앙을 증언한 선배 신앙인들에게 늘 감사드리고 그 모범을 따라 살 것을 다짐하자”고 말했다.
이형우 아빠스는 “순교자의 후손으로서 부끄럽지 않게 살아야 한다는 다짐이 한국교회를 지탱하고 키워준 힘이 아니었나 생각해 본다”며, “우리도 그분들처럼 신앙을 증거하며 살아갈 수 있길 바라며 하느님의 도우심을 빌어본다”고 말했다.
대구대교구 왜관지역 5개 본당과 성 베네딕도회 왜관 수도원은 이선이 순교 150주년을 맞아 9월 순교자 성월 한 달 동안 매일(토·일, 연휴 제외) 미사를 봉헌해 왔다.
특히 신동본당은 1984년부터 해마다 신나무골 성지에서 순교자 현양미사를 거행하고 있다.
▲ 이선이 엘리사벳 순교 150주년 기념미사 참례자들이 순교자의 묘에 절하며 넋을 기리고 있다.
“죽어도 성교를 믿겠소”
▲ 김도율 신부(대구 큰고개본당 주임)가 그린 이선이 엘리사벳과 배도령 스테파노 모자.
경주 이씨 양반 가문에서 태어난 이선이는 성산 배씨 가문의 배정모와 혼인한 후 맏딸과 장남 스테파노(속칭 배도령, 당시 16세), 차남 용철(11세), 삼남 용덕(4세) 등 세 아들을 키워내며 열심히 신앙생활을 했다.
그러던 중 경신박해가 일어나자 이선이 가족은 신나무골 신자촌으로 피신했는데, 그곳에서도 서슬 퍼런 박해의 칼날을 피할 수는 없었다. 갑자기 닥친 포졸들을 피해 다섯 식구(맏딸은 혼인해 출가)는 건령산을 넘어 한티(현 한티순교성지, 경북 칠곡군 동명면 득명리)로 도망쳤으나 그만 체포되고 말았다. 배정모와 차남, 삼남은 그 자리에서 배교해 풀려났지만, 이선이와 장남 스테파노는 “너희들은 천주교를 버리겠느냐? 그렇지 않으면 이 자리에서 죽여 버리겠다”는 협박과 모진 고문에도 “죽어도 성교를 믿겠소”라며 끝까지 뜻을 굽히지 않았다. 화가 난 포졸들은 법적 재판도 없이 이웃 민가에서 갖고 온 작두에 목을 걸고 무자비하게 밟아 두 사람의 목을 잘라냈다. 이선이의 나이 42세였다.
이후 배정모는 아내와 아들의 시신을 거두어 한티에 가매장했다가 후에 이선이의 시신만 칠곡 안양동 선산에 안장했다. 당시 관습대로 미성년인 아들의 유해는 옮겨오지 않고 그 자리에 그냥 두었으므로 아직도 유해를 찾지 못하고 있다.
두 순교자들은 그동안 영명이 전해지지 않았으나, 1984년 7월 제7대 대구대교구장 서정길 대주교에 의해 ‘엘리사벳’과 ‘스테파노’로 각각 영명이 인준됐다. 이선이의 유골은 한국 천주교회 200주년을 맞아 1984년 7월 연고지인 신나무골에 재이장해 오늘에 이르고 있다.
■ 신나무골 성지
대구대교구 신나무골 성지(경북 칠곡군 지천면 연화리)는 박해시대의 교우촌이며, 대구본당(현 대구 계산본당)의 첫 본당터이자 영남교회의 선교 요람지이다.
1815년 을해박해 때부터 교우촌이 형성된 신나무골은 일찍이 파리 외방전교회 사제들이 대구 진출의 전초 기지로 삼아 사목활동과 전교를 했던 곳. 특히 1860년 경신박해 때 이선이와 장남 배도령이 순교 직전까지 살았던 생활 터전이었다.
이후 신나무골은 1885년 대구 첫 본당 신부로 임명된 파리외방전교회 김보록 신부가 이곳에 거처하면서 대구교회를 설립하고 경상·전라·충청도 일부 지방을 2년간 사목하는 등 영호남교회의 교두보로서의 역할을 담당했다.
지금도 신나무골 성지에는 이선이 순교자의 묘소와 함께 김보록 신부가 신학문과 교리 등을 가르쳤던 학당, 사제관 등이 남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