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하느님의 아드님이 사람 되심
『나의 아버지』와 연관시켜 『사람의 아들』이란 칭호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사람의 아들이란 예수님이 자주 자신에 관하여 언금하신 칭호이다. 다니엘서 7장의 영향을 받은 묵시록의 용어로 본다면 이 칭호는 하느님의 이름으로 구름을 타고 내려와서 심판하실 초자연적인 인물로 드러난다. 그는 전권을 지닌 분이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자신을 『사람의 아들』로 호칭한 그 맥락 안에서 감추어진 자신의 초월성에 대한 것 만큼 자신의 인성에 대해서는 강조하지 않으셨다.
그러나 그분의 말을 듣는 사람들에게는 매우 분명하게 들려졌을 것이다. 하느님을 자신의 아버지로 그리고 자신을 그분의 아들로 지칭하심으로써 예수님은 청중들로 하여금 어느 예언자가 그들을 기다리게 한 것보다도 훨씬 더 진하게 자신의 초월적 성격을 그러내셨다. 그분이 이런 식으로 권위있게 말씀하심으로써 안식일에 대한 그분의 태도와 죄를 사하는 권한 선포 등은 서로 빛을 발하게 된 것이다. 그 모든 것은 그분이 『하느님의 아들』이란 칭호를 자신에게 적용시킴으로써 결과적으로 그 칭호의 의미가 고양(高揚)된 것으로 보인다.
다시 말해서 아버지 하느님은 예수님의 아버지라는 사실이다. 이는 제자들 뿐 아니라 그분의 말씀을 귀담아 들은 사람은 누구나 이를 인정하였을 것이고 제자들의 지상적 메시아관도 점점 분명해진 것으로 보인다. 비록 그것이 예수님과는 동상이몽으로 끝나긴 했어도 제자들에게는 생사가 달린 일이었다. 그리고 요한 복음에서는 부자일치 사상이 당연하게 제시되고 있다. 전형적인 표현은 이것이다. : 『아버니와 나는 하나이다』(요한 10,30). 이는 신적 친자성(親子性)을 확실히 말하는 대목이다.
이는 요한 복음의 사상과 일치한다. 하르낙(Harnack) 같은 이를 공관 복음서 안에 있는 요한계 유성(流星_이라고 하였다. 그것은 마태와 루가 안에서 아드님의 친숙한 기도로 표현되어 있으니, 그것은 아버지의 앎이 곧 아들의 앎이요 그 관계는 실로 오묘하나 사랑스럽고 너무나 친숙한 관계가 아닐 수 없다. 『하늘과 땅의 주님이신 아버지, …아버지께서는 모든 것을 저에게 맡겨 주셨습니다. 아들이 누구인지는 아버지만이 아시고…』(마태 11,25-27 루가 10,21-22).
(6) 예수의 메시아성
자신을 사람의 아들로 지칭하신 예수님은 사람들과 특히 제자들에게 로마의 속국이었던 이스라엘이 다윗과 솔로몬의 화려한 시대로 돌아가리라는 기대를 심어주었다. 기적을 행하사 많은 병자들을 치유하시고 언변과 능력으로 율사들과 바리사이들을 제압하신 예수님은 당신의 추종자들에게 분명히 지상의 메시아로 보였으리라. 앞에서 다니엘서 7장의 암시와 그 본문이 모든 묵시문학 안에서 광범위하게 반향하고 있었음을 언급한 바 있다.
「사람의 아들」은 마지막 시대에 하느님의 궁극적 의도들을 수행하기 위하여 높은 곳으로부터 하느님에 의해 파견된 천상적 인물이다. 예수님은 사랑의 아들로 자신을 지칭하신 후 즉시 많은 고난을 당하고 원로들과 대사제들과 율사들에게 버림을 받아 죽임을 당했다가 사흘 후 다시 살아난다고 하셨다(마르 8,39,31). 그는 할 수 없이 스승을 나무란다. 베드로와 그의 동료들의 기대는 자기들의 스승이 예루살렘에 올라가서 로마 군인들을 다 몰아내고 과거의 화려했던 다윗과 솔로몬의 영화로운 왕국을 재건하시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분은 자신의 입장을 분명히 밝히셨다.『사람의 아들은 섬김을 받으러 온 것이 아니라 섬기러 왔고, 또 많은 사람들을 위하여 목숨을 바쳐 몸값을 치르러 온 것이다』(머루 10,45). 이 말씀은 제자들에게 겸손된 자세로 봉사할 것을 강조하신 후에 하신 말씀이므로 제자들에게 더 이상 주저할 여유를 주지 않았다. 따라서 이사야 53장에 대한 암시가 자연스럽게 이어진다. 예수님은 그들에게 전적으로 초자연적인 『사람의 아들』로 부각되었다. 그리하여 그에게는 악의 세력을 판단하고 승리하는 하느님의 통치가 맡겨져 있다고 사람들은 여겼던 것이다.
이사야 53장에 등장하는 그 야훼의 고통받는 그 종은 바로 사람의 아들로 인정된 예수님으로서 사람들로부터 무시당하고 배척받으며 그분의 무죄한 고통들과 죽음은 바로 죄인들의 속량이 된다는 주장이었다.
사실 신약성서는 그 고통받는 종을 과감하게 예수님께 돌렸다 비록 후기 유다교는 원시 그리스도교의 주장을 수용하지는 않았다 하더라도 그리스도교는 예수님을 제외한 어떤 사람에게 그 인물을 돌린다는 것이 불가능하다고 보았을 것이다. 그러므로 복음서의 전통들과 후기 그리스도론들도 이를 기초로 하여 확립되어 있다.
한편 이 주제에 대한 열쇠는 예수님에게 있다. 과연 그분은 자신을 고통받는 종으로 인정하였을까? 그분의 의도는 확실한 것으로 보인다. 사람의 아들과 고통받는 종에 대한 두 예언적 인물이 다소 차이가 있어도 여기에는 하나의 공통적 의미가 있다. 그 점은 예수님의 핵심적 가르침들 중의 하나이다. 다니엘서의 『사람의 아들』은 지상에 있는 보통 사람들과는 달리 하늘의 구름을 타고 온다. 그는 보통 사람들과는 다르나 인간의 모습을 하고 있다. 반대로 그 종은 모든 이들로부터 배척당하나 모든 사람들의 죄를 대신 짊어진 인물이며 자기의 상처로써 모든 사람들을 치유한다(참조, 이사 53,1-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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