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탄했던 이사악 이야기는 즉시 야곱 이야기를 넘어가는데 전 여덟장에 걸쳐 야곱의 극적인 생애를 다루고 있다. 리브가는 에사오와 야곱, 쌍둥이를 낳았다. 『에사오는 날쌘 사냥꾼이 되어 들에서 살고 야곱은 설질이 차분하여 천막에 머물러 살았다. 이사악은 에사오가 사냥해오는 고기에 맛을 들여 에사오를 더 사랑하였고 리브가는 야곱을 더 사랑하였다.』(25, 27~28)
야곱이 에사오의 장자권을 뺏는 이야기는 너무나 유명하다. 사냥에서 돌아와 허기가 졌겠지만 아무리 배가 고프다고 그렇게 허겁지겁, 중대사안을 소홀히 해버리는 에사오의 경솔함이 문제였다. 에사오의 결정적 허점은 장자권을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는 점이고 그러니 장자권을 대수롭지 않게 뺏긴 것이다. 나중에는 장자가 받는 최후의 축복까지 야곱이 가로챘는데 이 대목에서 의문을 가질 수도 있다. 야곱이 그렇게 속임수를 써서 남의 것을 뺏는 것이 정당하냐는 것이다. 하느님께서 어떻게 이런 행동을 두둔하실 수가 있느냐 하는 것인데 두둔하셨다기 보다는 하느님께서 인간의 개성, 실수와 잘못까지 이용하여 당신의 계획을 이루신다는 측면에서 생각해야 한다.
카인과 아벨, 이스마엘과 이사악, 에사오와 야곱 이들중에 어느 하나를 선택하면 다른 쪽이 버려진다고 생각하기 쉬우나 하느님의 선택은 그것이 아님을 확인하였다. 아벨을 죽인 카인에게도 끝까지 보호조치를 해 주셨으며 아브라함의 집에서 추방당한 이스마엘도 큰 민족을 이루게 해 주셨다.
동생에게 장자권과 축복마저 빼앗긴 에사오에게도 많은 후손과 땅을 주셨다. 『이 모든 선택들은 사실 하느님께서 이스라엘의 선택에 앞서 준비하신 작은 선택들이라고 볼 수 있다. 하느님께서 이스라엘을 선민으로 뽑으신 것은 그들만을 구원하시고 다른 민족들은 멸망시키기 위한 것은 아니었다. 곧 이스라엘의 선택은 만민의 구원을 위한 하나의 예표이다. 그들의 문화와 민족사 안에서 당신의 구원계획을 밝혀주시므로써 만민을 구원하시고자 하는 구체적인 청사진을 제시하신 것이다』(정태현 신부의 하느님과 함께 걸으며).
하느님은 인간을 선택하실 때 완전한 자유를 행사하신다. 그러나 이 자유는 그분의 선하심과 자비에 바탕을 둔 것이기에 결코 배타적인 선택이 아니라 항상 모든 이의 구원을 위한 도구로서의 선택이라고 생각하면 옳을 것이다. 자 그러면 속임수를 쓴 야곱이 어머니 사랑과 하느님의 빽으로 마음 편히 살 수 있었는가?
그날부터 야곱은 그 대가를 톡톡히 치루어야 했다. 형과 아버지의 분노를 샀기 때문에 집에 살 수가 없어 도망갈 수 밖에 없는 신세가 된다. 그때부터 야곱은 방랑의 삶, 타향살이를 시작하여 삼촌 라반의 집에서 14년간이나 머슴노릇을 한 후에 그가 사랑하는 라헬과 결혼하지만 독립하기 위해서 라반의 집에서도 도망치듯 나와야 했고 돌아오는 길에서 형과 맞닥뜨려야 하는 심적 두려움 등 그의 생애는 항상 불안하기만 하였다.
야곱의 생애에 두가지 일화가 있다.
1. 베델에서의 꿈(28, 10~22)과 2. 야뽁나루에서 천사와 겨룬 싸움(32, 25~29).
야곱이 브엘세바를 떠나 하란을 향하여 가다가 한곳에 이르러 돌을 베개삼고 노숙을 하게되었다. 그는 꿈에서 하늘에 닿는 층계가 있고 그 층계를 하느님의 천사들이 오르락 내리락 하는 것을 보고 있었는데 하느님이 나타나시더니 『나는 야훼 네 할아버지 아브라함의 하느님이요, 네 아버지 이사악의 하느님이다…. 내가 너와 함께 있어 네가 어디로 가든지 너를 지켜주다가 기어이 이리로 다시 데려오리라.너에게 약속한 것을 다 이루어 줄 때까지 나는 제 곁을 떠나지 않으리라』하셨다.
야곱은 잠에서 깨어 두려움에 사로잡혔다. 그는 베고 자던 돌을 세워 석상을 만들어 기름을 뭇고 그 제단을 베델이라 불렀다. 베델은 창세기 12장에서 아브라함이 이미 제사를 드린 곳이고 후손 대대로 예배의 장소가 된다.
홀홀 단신 맨손으로 집을 나섰는데 얼마나 막막하고 불안했겠는가. 그런데 꿈 속에서 하느님을 만나 사기를 얻게 된 그는 다시 하느님께 서원한다.
『제가 이 길을 가는 동안 하느님께서 저와 함께 하여 주시고 저를 지켜주셔서 무사히 제가 아버지의 집으로 돌아가게만 하여주신다면 저는 야훼님을 제 하느님으로 모시고 제가 세운 이 석상을 하느님의 집으로 삼겠습니다. 하느님께서 저에게 무엇을 주시든지 그 십분의 일을 반드시 드리겠습니다』
약속의 내용이 비록 조건부적이고 인간적 계산이 들어있긴 하지만 당신을 한분 하느님으로 모신다는 유일신사상이 들어있고 하느님의 역사하심에 대한 신뢰가 들어있다. 개신교에서 실시하는 십일조가 여기서 유래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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