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예수님의 가르침
예수님은 인간성의 새로운 유형, 즉 하느님의 자녀인 인간성의 모델로 제시된다. 즉 그분의 죽음이 우리의 죄로부터 우리를 구원하기 때문에 그분은 자신의 자발적인 비하로써 우리 죄의 짐을 스스로 지고 가셨다는 데 있다. 이는 그분 죽음의 구원론적 의미로서 원시교회의 신앙고백 정식(定式)(1고린 15,3『…성서에 기록된 대로 우리의 죄 때문에 죽으셨다는 것과…』)으로 성만찬 전승(1고린 11,24마르 14,24)에서 이미 그분의 죽음은 사람들의 구원을 위한 대리속죄의 죽음으로 이해했던 것이다. 이리하여 인간을 한럾이 사랑하시는 하느님의 신적 부성이 사랑하는 당신 아드님의 죽음 안에서 빛나고 있다. 이는 복음이 강조하는 아가페적 사랑의 극치이다. 『벗을 위하여 제 목숨을 바치는 것보다 더 큰 사랑은 없다』(요한 15,13)는 말씀과 『십자가의 어리석음』(1고린 1,18)을 통하여 모든 사람들의 죄의 짐을 대신 지고 가신 예수님은 인류의 메시아이시다.
(7) 이웃사랑
하느님을 먼저 섬기고 이웃 사랑을 실천하는 것이 모든 법의 근본이다. 예수님은 아버지 하느님에 대한 가르침을 펴신 다음 이웃 사랑 실천을 대단히 강조하셨다. 여기에 관한 그분의 가르침은 무엇보다도 그분이 제자들에게 주신 주님의 기도(마태 6,9-13)와 고별사(요한 13,34-3515,9-12)에서 두드러진다. 고별사는 그분의 유언과도 같다. 그만큼 이웃 사랑실천이 중요하다는 의미이다.
아버지 하느님을 『나의 아버지』로 부르신 그분은 사람들에게는 『우리 아버지』로 부르도록 하셨다. 만민이 하느님을 『우리 아버지』로 칭할 때 만민은 모두 형제 자매들이 된다. 이것은 우리 사랑의 출발점이다. 여기서는 인간 사회 안에서 일어날 수 있는 온갖 갈등을 배제한다. 즉 신분 구별이나 인종 차별 같은 것이 있을 수 없는 것이다. 이를 바탕으로 하여 용서와 화해의 중요성, 복수동태법(마태 5,38-42)의 극복, 무자비한 종의 비유(마태 18,23-35)등이 그분의 중요한 가르침임을 실감할 수 있는 것이다. 이와 같이 이웃에 대한 사랑은 그리스도교 영성에서 중심적인 위치를 차지한다.
그러면 누가 나의 이웃인가? 예수님은 착한 사마리아 사람의 비유(루가 10,25-37)에서 타인의 특별한 상황이나 필요에도 함께 해야 한다고 가르치셨을 뿐 아니라 마지막 심판의 기준(마태 25,31-46)에서는 버림받고 소외된 이들에게 해 주는 것이 바로 당신에게 하는 것이라고까지 하실 만큼 이웃 사랑실천을 강조하셨다. 그러므로 그분은 이웃에 대한 사랑을 하느님께 대한 사랑과 결부시키셨을 뿐 아니라 그리스도인 생활의 중심에 놓으심으로써 사랑의 새로운 차원을 제시하셨다. 따라서 그분은 『너희에게 새 계명을 주노라』(요한 13,34)라고 하심으로써 형제애의 상호 인격적 측면을 강조하신 것이다. 또한 예수님은 제자들을 위한 기도에서 『아버지와 제가 하나인 것처럼 이 사람들이 하나가 되게 하소서』(요한 17,22)라고 하셨다. 『이 사람들』은 아마도 그분의 제자들의 공동체, 더 나아가서는 그분의 이름으로 모인 교회 공동체들이 모두 성부와 성자께서 각각 독립된 위격이시거나 사랑 안에서 완전히 하나인 것처럼 일치되기를 원하신 기도가 아니겟는가?
이와 같이 사랑의 실천은 세상 시초부터 끝나는 그 날까지 인간에게 주어진 의무이자 인간 본연의 삶이다. 교회는 그 시초부터 항시 여기에 대하여 이야기해 왔으며 새로운 천년기를 바라보는 20세기 후반이나 세상 종말 때까지 그 가르침을 계속해서 이야기할 것이고 수행자들은 그것은 화두로 수행에 정진할 것이며 그리스도인들은 그것을 주님이 오시는 그날까지 실천할 것이다. 하느님과 함께 하는 삶이 바로 이런 삶이므로 하늘나라에서도 사랑만 남을 것이다. 사랑은 모든 것이다. 그러나 인류 공동체는 아직까지 사랑 안에서 하나가 되지 못하였다. 이는 세상 종말 때까지 인류가 기도와 수행으로 성취해야 할 중요한 과제이다. 으뜸 사도 베드로에게 주님은 『시몬아, 너 나를 정말 사랑하느냐?』라고 물으셨고(요한 21,15-17) 율법학자에게는 『너도 가서 그렇게 하여라』(루가 10,37)라고 하셨다.
(8) 십자가의 죽음
사람의 아들과 고통받는 야훼의 종에서 이미 언급된 것처럼 예수님은 많은 사람들을 위하여 목숨을 바쳐 몸값을 치르셨다. 그것은 그분의 비참한 수난과 십자가의 죽음이었다. 그분은 자신의 죽음을 세 번이나 예언하셨고 원로들과 제사장들과 율법학자드에 의해 고난을 받고 십자가 위에서 비참하게 돌아가시고 묻히셨다. 그분의 수난사에 대한 여러 가지 연구가 있으나 여기서는 소개하지 않겠다. 교회의 올바른 가르침은 이러하다. 그분은 인류의 죄악을 위하여 돌아가셨고 그 죽음은 인류를 구속하신 사건이다 (참조, 로마 5,6-8). 왜 하필 십자가의 죽음인가? 야훼의 고통받는 종의 모습이 예수님 안에서 그대로 이루어졌기 때문인가? 이는 신앙 안에서만 이해할 수 있는 해답이다. 그 당시 가장 비참한 사형방법은 로마인들이 하던 맹수형이거나 십자가 처형이었다. 후자에 대하여 몇 가지를 알아보자. 이런 주제는 사순시기나 수난 묵상용으로도 좋을 것이다. 로마에서는 자유인에 대해서는 가느다란 채찍을 사용하였고 노예에 대해서는 작은 뼈가 달린 채찍이나 납덩어리가 달린 채찍을 사용하였다. 유다법에 의하면 채찍질은 39번이나 40번이었으나 로마법에는 그런 법이 없었다. 예수님께 가해진 채찍질은 납덩어리를 단 채찍이었던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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