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렉산드리아 포르토 호의 드망주 주교에게. 뮈텔 주교에게 보좌 주교의 사망을 조용히 알릴 것. 전보 28일. 게브리앙”
1925년 한국 79위 순교자가 로마에서 시복된 후, 드망즈 주교는 다음해인 1926년 뮈텔 주교와 함께 한국에 도착했다. 두 달여에 걸친 항해 끝에 대구로 돌아오면서 이들은 ‘뮈텔 주교의 보좌주교 선종’이라는 비보를 받고 슬퍼하기도 한다. 한편 같은 해 5월, 순종의 서거로 드망즈 주교와 대구 신자들은 함께 모여 평화의 기도를 바친다.
1926년 1월 15일~3월 1일
우리는 2시에 경리부를 떠났다. 우리는 포르토 배에서 양쪽에 하나씩 침대가 있고 2개의 세면대, 작은 벽장들이 있는 아주 큰 선실을 차지했다. 편하기는 하지만 다른 여객선의 1등실보다는 못하다. 선장을 만났다. (중략) 배는 4시30분에 떠났고 석양 때 바다는 아직 좋았다. 17일, 우리는 선실에서 미사를 드렸는데, 날씨가 허락하는 한 계속될 것이다. 마리아의 전교자 프란치스코회 선교사들을 태우기 위해 8시30분 나폴리에 닿았다.
20일, 어제 저녁 11시 조금 전에 선실로 돌아왔다. 뮈텔 주교는 춤추는 사람들의 소리 때문에 잠을 못 이루다 막 잠자리에 들려고 할 때 무선전신을 받았다. 1월 19일 파리 발신. 8시25분 알렉산드리아에서 수신. 도착 21시. “알렉산드리아 포르토 호의 드망즈 주교에게. 뮈텔 주교에게 보좌(드브레) 주교의 사망을 조용히 알릴 것. 전보 28일. 게브리앙.” 나는 이 소식을 뮈텔 주교에게 자연스럽게 전했다. 우리는 함께 기도를 바쳤고 아침에는 고인을 위해 미사를 드렸다. (중략)
2월 28일, 우리는 아침 10시 일본 고베에서 기차를 타고 저녁 10시 시모노세키에 도착했다. 3월 1일, 배가 정확히 8시에 부산 부두에 닿았다. 베르모렐 신부가 나의 복사와 많은 신자들과 같이 나와 있었다. 정오에 대구에서는 신학교의 모든 신부들과 학생들이 역까지 나와 있었다.
5월 1~29일
조선의 전 왕(순종을 말한다)이 금주에 사망했으므로 나는 서거 후 첫 주일인 내일 문상하러 갈 것을 의논하러 갔다. 다음날, 이미 벽보로 예고됐고 아침에는 대성당의 보좌신부가 강론에서 예고한 3시 성체강복식이 주교에 의해 집전됐다. 신학생, 수녀들과 그들의 학생들, 많은 교우들과 꽤 많은 외교인들까지도 참석했다. 성모찬미가에 이어 교우들이 한국어로 다 같이 기도문을 제외하고 성인열품도문을 바쳤고, 나는 평화를 위한 기도를 노래했다. 이 모든 것은 한국을 위해 전 왕의 서거를 계기로 한 것이다.
29일, 아침에 나는 11명의 신학생들에게 1·2품을 주었고, 11명에게 사제서품을 주었다. 이것은 한국에서 한 번에 행해진 것 중 가장 많은 수의 서품식이다. 22명의 선교사들과 한국인 사제들이(새 사제들에게) 안수를 했다.
가장 많이 본 기사
기획연재물
- 길 위의 목자 양업, 다시 부치는 편지최양업 신부가 생전에 쓴 각종 서한을 중심으로 그가 길 위에서 만난 사람들과 사목 현장에서 겪은 사건들과 관련 성지를 돌아본다.
- 다시 돌아가도 이 길을한국교회 원로 주교들이 풀어가는 삶과 신앙 이야기
- 김도현 신부의 과학으로 하느님 알기양자물리학, 빅뱅 우주론, 네트워크 과학 등 현대 과학의 핵심 내용을 적용해 신앙을 이야기.
- 정희완 신부의 신학서원어렵게만 느껴지는 신학을 가톨릭문화와 신학연구소 소장 정희완 신부가 쉽게 풀이
- 우리 곁의 교회 박물관 산책서울대교구 성미술 담당 정웅모 에밀리오 신부가 전국 각 교구의 박물관을 직접 찾아가 깊이 잇는 글과 다양한 사진으로 전하는 이야기
- 전례와 상식으로 풀어보는 교회음악성 베네딕도 수도회 왜관수도원의 교회음악 전문가 이장규 아타나시오 신부와 교회음악의 세계로 들어가 봅니다.
- 홍성남 신부의 톡 쏘는 영성명쾌하고 논리적인 글을 통해 올바른 신앙생활에 도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