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성체첨례 중 거행된 성체거동 행사.
1926년 말 일본 대정천황이 죽고 다음해 장례식이 행해졌다. 드망즈 주교를 비롯해 대구교구에서는 누구도 천황의 죽음을 위한 신도의식에 참여하지 않았다.
한편 드망즈 주교는 나바위에서 피정을 하는 등 바쁜 일정을 소화했다. 그런데 1927년 여름, 한 달 동안 비가 오지 않는 20년 이래 ‘최악의 더위’가 시작됐다. 주교는 곧 ‘비를 기원하는 기도를 명하는 회람’ 제27호를 발송했다.
1926년 12월 22~31일
2시간을 자동차로 갔다. 잠시 5분간을 예천에서 멈추고 나의 복사와 그의 짐들을 내려놓았다. 복사와 나는 몸이 얼어서 작은 시장에 도착했다. 나는 11시30분 주교관에 닿았다. 거기서 라리보 신부가 서울의 보좌주교로 임명됐음을 알았다.
성무집행의 관점에서 이 세 번째이자 43일간의 마지막 순시는 흥미로웠다. 교우들의 종교교육이 잘 됐고, 개종에 희망이 보였다. 경주는 아주 조촐한 시작이지만, 외교인 지방인 이 지역의 발전을 희망하게 했다.
26일, 어제는 모든 것이 여느 때처럼 대성당에서 이뤄졌다. 살을 에는 듯한 추위에도 불구하고 신자들이 매우 많았고, 성대한 첨례였다. 성체강복 후 우리는 벽보를 보았는데, 일본의 천황(대정천황)이 새벽 1시30분 사망했음을 알렸다. 오늘 강론 마지막에 나는 이 기회에 할 기도를 공포했다. 나는 천황의 사망을 계기로 기도를 위한 회람 엽서를 발송했다.
31일, 저녁 때 이 해를 마무리하는 성체강복에 18명이 참석했고, 식탁에서는 새해를 기원했다. 1926년은 특히 큰 서품식의 해였다. 하느님께서는 대구교구에 이처럼 많은 은혜가 베풀어진데 대해 감사를 받으실지어다!
1927년 2월 8일~8월 1일
어제와 오늘 일본 천황의 장례식이 행해졌다. 어제 애도를 표하는 제등으로 거리를 장식했고, 저녁 11시 조종을 울렸다. 학교(대구에 있던 해성학교와 효성여학교)에서는 공립학교와 마찬가지로 명령에 따라 어제 아침 10시 특별한 애도곡을 불렀고 도쿄를 향해 절을 했다.
교구에서는 신도 의식에 참석하러 오라는 초대에 아무도 응하지 않았는데, 그 의식은 영하 10도의 추위 속에 저녁 11시 도청마당에서 열리며 외투와 모자를 착용하는 것이 금지됐다. 3월 24일, 오늘 아침 10시 여학교 졸업식에 참석했다.(중략)
6월 11일, 오늘 아침 나는 신학교의 공동체 미사에서 8명에게 서품을 주었다. 다음날 1시 기차로 떠나 6시 대전에 도착했다. 13일, 4시 기차로 대전을 떠나 나바위로 갔다. 18일, 나의 피정을 끝냈다. 어제 4시 기차로 논산에 가서 오늘 아침에 대구로 떠났다.
19일, 성체첨례를 아주 훌륭히 치렀다. 밝은 햇빛 아래서 성체거동을 했다. 27일, 비를 기원하는 기도를 명하는 회람 제27호를 발송했다. 8월 1일, 한 달 동안 비가 내리지 않고 있다. 20년 이래 가장 심한 더위다. 지난주 관상대에서 39도 6분, 이곳은 38도였다. 수확이 위태롭게 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