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등학교에 다니는 두 아들을 둔 박모씨(여·43)는 남편의 외도로 이혼한 상태로 박씨는 이혼후 두 아들의 양육을 맡았지만 자신의 호적은 친정에 있고 아이들 호적은 전 남편에게 있어 아이들은 그녀에게 동거인으로만 등재돼 있다.
박씨가 아이들과 한 호적을 만들려면 아들이 만 15세가 된 뒤 아들 호적을 만들어 그 밑으로 들어가야 한다.
이러한 사례들은 현재 시행되고 있는 호주제에서 발생하는 모순의 결과로 남성으로 이어지는 호주라는 지위를 통해 남성이 가족구성원을 지배하고 통솔한다는 종적이며 권위주의적 사고방식에서 그 문제점을 발견할 수 있다.
호주제에서 호주가 사망하면 그 승계순위는 직계비속 남자(아들), 가족인 직계비속 여자(미혼의 딸), 처, 가족인 직계존속 여자(어머니), 가족인 직계비속의 처(며느리)로 정해져 있어 미성년인 아들이나 서너살 먹은 손자가 어머니와 할머니를 제치고 호주가 되는 불합리한 현실이 벌어지고 있다.
심지어 외도하여 낳은 아들이 본처의 딸을 제치고 호주 노릇을 하게되어 남성우월주의와 여성경시를 법으로 조장하고 혼인의 순결마저 무시하고 있다.
또 다른 문제는 호주제가 가족의 의미를 왜곡 시키고 있다는 것이다. 민법은 「호주의 배우자, 혈족과 그 배우자 기타 본 법의 규정에 의하여 그 가(家)에 입적한 자는 가족이 된다」(제779조)고 가족의 범위를 규정하고 있다. 이러한 법개념에서 보면 박씨와 박씨의 아들은 가족이 아닌 것이다.
이러한 가족개념은 애정과 신뢰, 평등에 바탕을 둔 부부를 기초로 한 가족이라는 상식적인 개념과는 달리 추상적이로 관념적인 「家」를 전제로 하여 호주를 중심으로 한 종속적이며 봉건적인 가족관을 국민들에게 심어주고 있다.
일제의 산물인 호주제
근본적으로 남녀불평등의 문제를 안고 있는 이 가(家)제도를 전제로한 호주제도는 제도사적으로도 우리의 고유한 미풍양속이 아니라 일제시대 식민정책 일환의 통치 이데올로기였다.
호적제도의 기원이 되는 가제도는 1898년 7월 16일 시행된 일본의 명치민법에서 법제화됐는데 이 가제도란 호주제도와 일본 무사의 군사적 통솔을 목적으로 혈족간의 단결을 도모하기 위한 일본 무사들의 관행이었던 가독상속제(家督相續制)를 근간으로 성립된 것으로 명치민법상의 호주권은 가족의 혼인, 입양, 분가, 입가 등에 대한 호주의 동의권이나 취소권을 비롯하여 호주에게 가족에 대한 지배적 권능을 대폭 부여하고 있다.
일제는 자신들의 이 제도를 내선동화와 조선의 호주와 가족을 천황의 하부구조화 할 목적으로 강제 이식시킨 것이다.
결국 호주제도는 일제 식민지배하의 정략적인 일본 동화정책에 따라 관제 관습법으로 정립되었으며 그 결과 우리의 전통적인 가족법제는 왜곡될 수 밖에 없었다. 그런데 보다 큰 문제는 해방 이후에도 이러한 내용에 대한 전반적인 검토와 수정없이 그대로 존속되어 왔다는 것으로, 이미 일본은 1948년 시행된 민법에서 호주제도 자체를 없애버렸는데도 우리는 아직도 그 망령에서 벗어나질 못하고 있다.
호주제도의 위헌성
호주제도는 한 가족 집단에 호주가 있어 그 가족에 대하여 일정한 권리와 의무로서 가족 구성원을 지배하여 통솔한다는 종적인 사고를 내포하고 상징한다는 점에서 개인의 존엄과 양성의 평등을 가족법 질서의 가치지표로 명시하고 있는 헌법의 평등원리에 위배된다.
또한 호주와 가족이라는 신분으로 구분하는 것도 사회적 특수계급을 부인하는 헌법정신에 위배되며 성년자들은 자신들의 권리를 온전히 행사한다는 교회법(98조 1항)의 취지와도 맞지 않다.
뿐만 아니라 남계혈통 중심의 호주승계제도 역시 양성 평등이념에 위배되는 것으로 외도를 해서라도 대를 이어야 한다는 의식을 사람들에게 심어주게 돼 남아선호사상으로 인한 낙태의 조장은 물론 혼인의 순결에도 반다는 것이다.
혼인의 경우에 있어서도 아내는 남편과 달리 입적함으로써 출가외인이 돼 친가와 시가형제의 불평등의 원인이 되고 자녀를 가진 사람이 재혼할 경우 여자의 동의가 필요없는 남자와는 달리 여자는 그 자녀의 호주의 동의와 남편의 동의를 얻어야 하며 남편의 동의를 얻었어도 자녀의 성을 바꿀 수 없다.
이러한 입적원칙은 여성에게 가족원의 지위만을 인정하는 것을 전제로 하고 있어 여성의 부모로서의 권리행사에 대한 굉장한 불이익을 주고 있는데 이 역시 헌법상의 남녀평등 이념 내지 인간의 존엄성에 비추어 볼 때 타당하다고 볼 수 있다. 올 초에 열린 민법 개정안 공청회에서 호주제도가 폐지되면 이를 기반으로 해서 규정되어 있는 400개 이상의 법률을 개정해야 한다는 이유로 호주제도 폐지가 빠졌는데 이는 호주제도로 인해 400개 이상의 인간차별법이 존속한다는 의미다.
민주사회 발전의 저해요소
호주제는 여성차별만의 문제가 아니다. 남자 어른에게는 호주의 지위에 걸맞는 사회적 기대가 주어지고 어린 아들에게는 호주가 될 인물에 대한 기대가, 어린 딸에게는 호주의 아내로서의 사회적 기대가 본인의 능력이나 의사와는 관계없이 강요된다.
따라서 호주제도는 호주의 권리와 의무 강약과는 관계없이 민법에 존재한다는 그 자체로 「남성이 여성보다 우월하다」는 사회통념을 형성하고 관행화 돼 학교나 직장에서 여성들이 제대로 대접받지 못할 뿐 아니라 사회문화 안에 봉건적 의식을 조장하고 있다.
이러한 가부장적 사회의식은 결국 우리나라에서 개인의 자유와 존엄 그리고 평등이 존중되는 풍토를 배양하기 힘든 토양을 형성해 민주주의가 성숙되지 못하는 원인을 제공하는 것이다.
대안을 찾아서
현대 가족은 부부, 친자로 구성된 핵가족이 보편화된 사회로 이제는 핵가족 중심의 현대가족에게 걸맞는 가족 질서가 필요하다.
따라서 부부간의 평등한 인격을 전제로 자녀에게 부모 공동의 책임을 강조하는 공동체적 가치관에서 가족정책을 반영하여야 한다.
이러한 방향 아래 전문가들은 호주제도의 개선에 대하여 기존 가족별 호적과 1인1호적제 그리고 개인별 주민등록을 수정한 호적 등을 제시한다.
기본 가족별 호적은 부부를 단위로 부부동적원리 친자동적원리에 따라 편제하는 것을 말하고 구미(歐美)의 여러나라들이 택하고 있는 1인1적제는 개인 한명 한명에게 호적을 편제하는 방식으로 개인이 대표자로서 자신의 삶을 책임지도록 하는 제도이다.
개인별 주민등록제도의 수정은 현재 우리나라의 호적과 주민등록제도가 중복되어 있다는 점에 착안한 것으로 주민등록이 이미 신분등록제도로서 완전한 기능을 갖고 잇으므로 이를 보완해 호적과 일원화 하자는 제안이다.
민주사회는 바로 진정한 인간의 사회, 개개인의 인격이 존중되고 자유와 평등이 보장되어 남과 더불어 사는 사회이다.
민주사회복지국가 건설을 지향하고 있는 우리나라에서 평등사상을 침해하고 있는 호주제도를 폐지하고 이에 영향을 받아 규정되고 있는 법 등을 개정하여 사회적으로 잔존하고 있는 차별과 억압을 없애는 것은 생명을 사랑하고 존중해야 하는 창조질서에도 부합하는 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