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도가 출하되기 시작하는 여름·가을이 되면 문득 생각나는 이가 있다.
110년 전 복음을 전하기 위해 조선에 발을 내딛은 파란 눈의 선교사 앙투안 공베르(R. Antoie A. Gombert) 신부다.
1900~1932년까지 30여 년을 안성지역에서 복음전파 및 지역사회 발전에 헌신한 공베르 신부는 안성포도 전래의 시조.
그는 20여 종의 포도 묘목을 성당 앞뜰에 심고, 성당 근처에 사는 평신도 회장 박승명씨에게도
포도 묘목을 심도록 해 안성이 명품 포도의 고장으로 발전하는 토대를 마련했다.
현재 900여 농가가 포도를 재배하고 있는 안성의 포도재배는 이렇듯 공베르 신부에 의해 그 씨앗이 뿌려졌다.
■ 안성포도와 마음을 연 조선인
앙투안 공베르와 그의 동생 줄리엣 공베르 신부는 사제서품을 받은 지 2개월도 안 된 1900년 8월, 선교지인 조선으로 향한다. 10월 19일 첫 부임지 경기도 안성에 도착한 공베르 신부는 모든 것이 생소하기만 했다. 안성에서의 생활은 힘겨움의 연속이었다. 종교는 물론 문화, 언어, 식생활 등 모든 게 달랐다. 무엇보다 서양 종교와 외국인에 대한 적대감이 문제였다. 공베르 신부는 그의 일기를 통해 스스로를 불청객으로 표현하기까지 했다. 이 힘겨운 시기에 닫혀 있던 조선인들의 마음의 문을 열게 해준 것이 바로 포도였다. 공베르 신부는 포도 묘목을 들여와 안성성당 앞뜰에 심었고 포도나무가 열매를 맺자 안성 주민들과도 조금씩 친해져갔다. 신기한 외국 과일을 먹으러 먼저 아이들이 성당에 발걸음을 내딛었고 병자들도 약과 포도를 얻기 위해 공베르 신부를 찾아오기 시작했다.
이후 안성은 공베르 신부에 의해 포도 종자와 재배법 등이 전해지게 된다. 당시 전해진 포도 종자는 유럽에서 주로 와인을 제조하는 데 쓰인 머스캣(muscat)이다. 현재 국내 포도 생산량의 대부분은 생식용인 켐벨로 전체 포도 생산량의 70%가 넘는다. 공베르 신부가 전한 머스캣을 재배하는 포도 농가는 전국적으로 소수다.
그런데 공베르 신부의 숨결이 깃든 안성에서 머스캣으로 한국산 와인을 생산하고 있는 이가 있다. 와인 전문가이자 와인메이커인 케네스 킴(Kenneth Kim), 한국인 김길웅(70) 박사다.
■ 공베르 신부, 와인메이커를 이끌다
김 박사는 미국 캘리포니아에서 20여 년간 와인을 생산해온 전문 와인 메이커였다. 한국인 최초로 자신의 얼굴을 내건 독자 브랜드를 생산, 경쟁이 치열한 미국의 와인시장에 당당히 이름을 올리고 대회에서 수상까지 한 그였다. 그런 그가 오랜 삶의 터전이었던 미국 캘리포니아주를 떠나 경기도 안성까지 온 이유는 공베르 신부 때문이었다. 그가 공베르 신부를 처음 접한 것은 2000년 TV로 방영된 공베르 신부의 다큐멘터리를 통해서다. 안성지역은 바닷바람과 일교차 안개 등으로 포도의 당도가 타 지역보다 높아 머스캣을 재배하기에 제격인 곳. 그의 오랜 꿈을 110년전 이미 공베르 신부가 실현하고 있었다. “저도 모르게 온몸에 전율이 느껴졌습니다. 그때 저는 머스캣 품종 포도로 한국산 와인을 만들기로 결심했어요.”
현재 김 박사는 ‘케네스김 빈야드’란 브랜드로 일년에 5000병 정도의 와인을 소량 생산하고 있다. 이제는 한국 명품 와인이라는 입소문이 번져 쉐라튼, 워커힐, 르네상스 호텔 등에도 와인을 공급한다.
김 박사는 지난해 가을 프랑스 남부 호데즈에 위치한 공베르 신부의 생가를 방문했다. 공베르 신부를 추모하고 자신의 각오도 새롭게 다지기 위해서였다.
그의 “최종목표는 공베르 신부님께서 머스캣으로 포도와 포도주의 씨앗을 안성에 뿌렸던 훌륭한 문화 자원을 계승해 나가는 것”이라고 했다.
“이곳 안성에서 한국산 와인의 기적을 일구고 싶습니다. 안성이 머지않아 한국의 나파밸리가 될 수 있을 거라는 희망이 생겼어요.”
※문의 : 011-479-7843 케네스김 빈야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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