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97년 발족된 서울대교구 통일사목위원회 총무를 맏으며 그동안 민족의 화해와 일치를 위해 헌신해온 제2대 군종교구장 이기헌 주교. 서울 돈암동본당 출신인 이주교는 열심한 구교우 집안에서 성장해 어려서부터 줄곧 복사를 서며 일찍이 사제의 꿈을 키워왔다.
이주교는 지금까지 사목자의 길을 충실히 걸어올 수 있었던 것은 어머니의 지극한 정성과 기도 덕분이었다고 회고한다. 그는 작고한 아버지 고 이재풍(분도) 옹과 어머니 정용철(수산나·81) 여사 슬하에 4남4녀 중 넷째로 태어났다. 그의 친가, 외가 모두 순교자 집안. 이렇듯 순교자의 후손이라는 무게와 열심한 어머니의 신심은 그가 사제의 꿈을 키워나가고 올바른 사제의 길을 가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미쳤다.
이기헌 주교의 동창 홍성만 신부는 『신학교 시절부터 이주교는 모든 이들을 똑같이 편안하게 대해주던 훌륭한 사제였다. 그리고 『깊은 신심 속에서 언제나 주님의 말씀을 따르려고 노력하는 동료 사제들의 모범』이었다고 전했다.
75년 김수환 추기경으로부터 사제품을 받은 이주교는 지난 95년 교구 교육국장, 98년 교구사무처장 등을 두루 거치며 교구발전의 중추적인 역할을 담당해왔다. 특히 지난해 5월 이기헌 주교는 서울 민족화해위원회 위원 자격으로 최창무 대주교 등과 함께 북한을 방문, 남북 가톨릭 신자간에 교류와 협력의 물꼬를 트기도 했다. 이주교는 이산가족이다. 평양출신인 그가 이처럼 민족화해문제에 디재한 관심을 갖게 된 이유 중의 하나도 아직 가족 중 일부가 그곳에 남아 있어 누구보다 이산가족의 슬픔과 애환을 절감하고 있기 때문이다.
omnibus omnia!(모든 이에게 모든 것)이란 성서말씀을 신학교때부터 가슴에 품고 살아온 이기헌 주교. 차별하지 않고 모든 소외된 이들에게 주님의 사랑과 말씀을 전하는 것이 이주교가 지금까지 걸어온 신앙이요 영성이다.
약력
▲1947년 12월 31일 평양출생 ▲75년 가톨릭 대학교 신학과 졸업 ▲75년 12월 8일 사제서품 ▲76년 1월 천호동본당 보좌 ▲76년 6월 상봉동본당 보좌 ▲77년 1월 명동본당 보좌 ▲78년 3월~82년 8월 군종신부(육군 대위) ▲82년 9월 잠원동본당 주임 ▲90년 2월 일본 교포사목 ▲95년 9월 교구 교육국장 ▲98년 10월 교구 사무처장
<마승열 기자>
□ 군종교구는
정부의 특별훈령에 따라 1950년 12월 마련된 군종제도를 통해 1958년에 창설된 군종신부단이 군종교구의 전신이다. 군종신부단이 단순한 사제단체의 성격인데 비해 군종교구는 교황에 의해 설정된다는 점에서 큰 차이가 있다. 교회법(제368조·제372조)상 원칙적으로 일정한 구역으로 경계가 확정되는 개별교구와 달리 구역경계가 없이 전국에 산재한 군인을 대상으로 한다는 점이 다르다.
1977년 준교구 체계로 전환한 후 1989년 10월 23일 군종교구 설정과 함께 그해 11월 11월 11일 초대 교구장을 맞은 군종교구는 1998년 12월 31일 현재 군인성당 74곳, 공소 153곳, 군인신자 8만41021명으로 오늘에 이르고 있다.
<서상덕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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