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과 역사는 때로 묘한 것이기도 하다.
이미 100여년 전 그것이 어쩌면 하느님의 인도하심이었을지도 모르지만 지루하고 고단한 뱃길로 조선을 찾아오셨을 공 안토니오 신부님을, 너무나도 그립고 설레는 마음으로 이번에는 애가 그분을 찾아나섰다.
기체가 가볌게 떠올라 고도가 안정되자, 의자 깊숙이 몸을 묻고 가슴에 손을 얹는다. 안성본당의 초대 신부님이였으며 전쟁과 빈곤으로 척박한 안성에 진정한 선한 목자로서의 삶을 사셨던 한 선배 신부님의 호흡과 그 품에 안으신 그리스도적 사랑이 가슴벅찬 느낌으로 다가오지만 어디 그분의 것에 견줄 수 있을까?
여행은 어디를 가든 가고자 하면 떠날 수 있는 것이지만 선배 신부님의 유년을 찾아 떠난 이 9월의 여행은 아마도 내 일생에서 가장 의미있는 여행이 될 것 같다.
2천년 대희년이 되는 해에 우리 안성 천주교회는 설립 100주년을 맞는다. 그저 오래된 성당이라는 얘기만 듣고, 그 100주년 기념 성전 건립을 완성해야 한다는 책임감을 안고 살았다. 그동안 어려워진 경제사정 때문에 성전 건축을 마무리하는 것이 쉽지는 않지만 더 큰 부담은 100주년을 어떻게 기념하는가 하는 것이었다. 100년의 그 소중한 의미를 마음에 담아내기 위해 여러 가지 일을 전개해 나갔다. 그러던 중 초대 신부님의 특별한 행적을 만났다.
바로 안성의 포도 속의 역사 속에서 잔잔히 묻어 나오는 인간애였다. 그분의 기록을 더듬다가 6.25때 중강진 수용소에서 생을 마감하셨다는 얘기를 접하면서 마음이 많이 아팠다.
그 옛날 안성에 처음으로 천주교회를 세우고 신앙을 키우실 때의 시국은 점차 일본의 압제 때문에 고통스러워지고 있었으며 1910년 조선이 일본에 합병되었고, 3.1운동과 이후의 길고 어두운 역사의 터널을 안성에서 함께 겪으시면서 신부님은 모국의 형제들에게 청하여 보내온 돈으로 조를 팔아 배고픔에 지친 안성 주민들에게 나누어 주셨다.
또한 일경에게 쫓기는 사람들을 당신 거처로 맞아들여 외국인 사제로서의 지혜를 발휘하여 많은 사람들을 위기에서 구해주셨고, 조선 민병대에 직접 찾아가 조언을 주시기도 하였다. 나라를 되찾고 힘이 있으려면 배워야 한다고 안성에 지금의 안법고등학교를 설립하셨으며 선교기금으로 50여 만평의 땅을 사서 농민들이 경작할 수 있도록 배려를 하셨고 모국의 포도 묘종을 들여와 안성지역에서 직접 재배하여 널리 심어 수확의 기쁨을 주셨다.
그렇게 어려움을 함께 겪으며 저희 성당에서 32년간 머무르시다가 서울의 용산신학교와 대신학교, 갈멜수녀원 등에서 지도신부로 계셨으며, 1950년 6.25가 발발하자 인민군에 의해 북으로 끌려가셨고 1950년 11월 12일 평북 중강진에서 선종하셨다.
고국서 보낸 돈으로 주민 보살펴
이제 그분이 뿌리셨던 밀알들도 100년의 시간을 지나오면서 안법고등학교는 경기도에서도 질서와 분위기가 반듯하고 학업성적도 뛰어난 명문학교로 성장하였고 안성 천주교회를 모태로 하여 천안, 평택은 물론 안성 관내에도 이미 5대 본당이 뿌리깊은 거목으로 해를 거듭하고 있다.
그리고 천주교회라는 종교 여하를 떠나 안성포도로 자리를 굳힌 포도는 말 그래도 안성포도의 역사가 되어버렸다.
오랜 시간을 지내면서 공 신부님의 아름다운 뜻과 존재 자체도 까마득히 잊혀져 갔디만 본당 100주년을 준비하며 제 자신이 제일 먼저 신부님을 세상에 알릴 수 있도록 준비하는 마음으로 우리 본당 신자들과 함께 중강진 어디쯤에 계신 초대 공신부님의 유해를 모셔올 수 있도록 기도와 할 수 있는 모든 사업을 구상하여 실천 중이다.
그분을 위한 성가의 밤, 서명운동준비 그리고 교황님께도 기도를 청했으며 이번이 두번째 프랑스 방문으로 생가부터 시작하여 한국에 선교사로 오시기까지의 흔적을 찾아 나서는 길인 것이다.
프랑스에 도착하여 차를 몰고 공신부님의 고향으로 향하는 9월의 모습은 우리네 가을과 많이 닮았다. 하늘은 높고 들판에는 단풍이 든 나뭇잎으로 가득했으며 탁 트린 채 지평선 끝간 곳까지 넓은 포도농장에서 포도 수확이 한창이다.
파리에서 남으로 1000킬로, 스페인 국경에서 멀지 않은 남프랑스 호테즈라는 작은 도시에 도착하였다. 인구가 2만9000여명, 주로 농업과 목축으로 살아가는 전형적인 농촌도시였다.
신부님은 1983년 18세의 나이에, 지금은 화브레중학교로 바뀌었지만 1950년까지 신학교였던 이 학교에 입학하여 1897년 6월에 삭발례를 갖고 신부의 길로 들어섰다.
화브레중학교를 나와 30여분 차를 달려 바라크빌에서 좌회전하자마자 어느새 끝없는 초지가 눈앞에 펼쳐졌다. 한가롭게 풀을 뜯고 있는 젖소들, 농익은 알곡이 가득 달린 옥수수밭, 그리고 지평선 끝에 언혀져 있는 구름들, 돌로 지어진 오래된 농촌 가옥들이 서 있는 신부님의 고향 킴블라제 마을에 도착하였다.
집이라야 2,3 백호 정도인데, 그 마을의 중심에는 성당(현재는 공소)이 있다. 그곳에서 본당 신부와 그 친지들과 주민들을 만났다. 시간을 뛰어넘어 자신들의 할아버지가 선교했던 동방의 먼 나라, 코레아에서 100년 만에 찾아 온 우리와 그분들 사이에 전혀 낯설지 않은 그리고 푸근한 마음으로 감사의 미사를 올렸다.
미사가 끝난 후 성당에서 불과 100미터도 안되는 가까운 거리의 안토니오 신부님 생가를 찾았다. 신부님의 생가는 전형적인 시골의 풍경 그대로를 담고 있었다.
신부 4명 등 7남매 봉헌
친지들과 둘러앉아 안토니오 신부님에 대해 이야기를 나눴는데 안토니오 신부님은 바로 이 집에서 1875년 4월 27일 오후 4시에 태어나셨다고 한다. 태어날 때의 본명은 뒤도네 공베르, 뒤도네는 하느님이 주신 선물이라는 뜻인데 당시 신부님의 아버지인 죠셉 공베르는 초등학교 교사, 어머니 라콩브 마리아는 평범한 주부이셨다. 안토니오 신부님의 부모님은 모두 17남매를 낳으셨고 그중 9명 만이 살았는데 안토니오 신부님은 그 중의 둘째 아들이셨다. 이 집안은 신앙심이 매우 깊어서 9명의 자녀 중에 신부가 된 사람이 4명, 평생 동정녀로 산 자매가 세사람이었단다.
안토니오 신부님의 생가에는 아직도 그분에 관한 흔적이 남아 있었다.
그 중의 하나가 1926년 안토니오 신부님의 조카 결혼식 때 참석해서 찍은 사진인데 안토니오 신부님의 나이 51세 때의 일이다.
사진 속의 안토니오 신부님은 턱수염을 길게 날리면서 근엄한 모습으로 서 계셨다.
그 때 그는 조카의 결혼 축하 선물로 안성의 짜유기를 가지고 오셨다는데 그것은 안토니오 신부가 사제품을 받은지 25주년이던 1925년 안성의 신자들이 선물한 것으로 한국의 안성에서 이곳에 보내진지 70여 년이 넘는 지금도 반짝 반짝 및나며 잘 보존된 그 방짜 유기는 유기 반상기가 안토니오 신부님의 생가 부엌 찬장에 모셔져 있었다.
은경축 선물로 유기 生家에 보존
파리외방선교회는 1800년대 동방에 선교를 하기 위해 설립되었으며 안토니오 신부님은 1900년 6월 24일 사제품을 받고 8월에 출발하여 10월에 안성에 도착하셨다. 한국의 선교 기간 중에 서신으로 안성의 사정을 보고하였는데 신부님의 편지에는 이런 내용이 있었다.
『농부들의 자녀들이 우리집을 찾아와 놀기도 하고, 내가 뜰에 심은 유럽의 과일나무 열매들을 먹으러 왔다』
『한 가난한 부인이 20살된 청년들 데리고 왔는데 그 청년은 폐병으로 죽어가고 있었다. 청년은 극도로 야위고 창백했고 목소리는 꺼져가고 있었다. 열이 나서 헐떡거리는 목을 시원하게 하고 싶어서 그는 내게 포도 한 송이를 청하러 왔다. 나는 그를 내 옆에 앉게 하고 그가 포도를 맛있게 먹은 동안 우리는 서로 얘기를 나누었다.
신부님께서는 미사 때의 포도주가 염려되어 직접 재배하려 했다고 하지만 서신의 글처럼 포도를 나누어 주셨다는 사실도 알 수 있었다.
어찌 되었든 여러 가지 작지만 소중한 그분 삶의 흔적을 따라 찾아내고 새롭게 확인할 수 있는 여행이었다. 아울러 신부님을 세상의 모든 사람들에게 알릴 수 있는 목적으로 추진하고 있는 유해 송환에 대한 용기도 생겼다.
또한 여행의 성과로 따진다면, 신부님 출신 본당과 자매결연을 맺고, 신부님 기일인 11월 12일에는 두 성당에서 동시에 기일미사를 드리기도 약속을 하면서 깊은 일치감과 가슴이 뜨거워지는 형제적 사랑을 느꼈다.
하늘에서 전구하시리라 믿어
어느덧 11월, 신부님의 기일이 다가오고 있다. 성당 마당가의 오래된 느티나무에 가을빛이 내리고 있다. 그 나무는 마치 신부님을 아는 듯 했다. 한참을 생각했다. 지난 5년 이곳에 살면서 한가지 새로운 사실을 하나 발견했다. 제가 추진하는 모든 일에 우리 공신부님의 타이들을 걸기만 하면 모든 것이 잘 이루어진다는 사실이다. 이번 여행 역시 안성시와 MBC에서 준비하는 포도 다큐멘터리 덕분이었다. 이 프로는 2000년 8월 방영될 예정이지만 이 역시 신부님의 이름을 걸고 추진하던 일로서 열매를 맺은 것이다. 모든 일이 신부님 전구라고 언제부터인지 나는 믿게 되었고 파리를 다녀온 이후로는 매 미사 때마다 영정을 제단에 모시고 신자들과 함께 미사를 올리고 있다.
공 안국(아토니오 곰벨트) 신부, 그분은 이 땅의 모든 것을 사랑했다. 당시 신부님과 함께 북으로 압송되었다가 생환된 드제니 수녀님의 포로 체험기에 보면 춥고 허기진 죽음의 행진 중에도 조선인은 절대로 당신을 죽이지 않을거라며 사랑의 신념을 가진신 분이라고 전한다.
그분에 대한 제 나름대로의 결론은 그분이 전하신 것은 포도 묘목이 아니라 이 땅에 하느님 나라의 나무를 심어주시려 했음이 아닐까 한다.
27대 본당신부로서 초대신부님을 기념하는 일과 100주년을 준비하는 시간은 정말이지 100년의 시간만큼 무거웠다. 하지만 천상에서 기뻐하실 것이라는 믿음을 가지니 무겁고 힘겨운 일상이 떠나가는 것 같다.
안또니오 기념성전 건립과 유해송환 그리고 100주년 행사 등에 하느님께서 함께 하심을 믿고 이 모두가 주님께 영광과 찬미로 바쳐지길 기도드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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