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재 저항·약자 옹호로 한국사에 족적
사회 약자 옹호 등의 ‘공공 리더십’ 실천이
종교·영적 영역 넘어선 ‘존경’ 이끌어낸 힘
사회 분열·갈등의 해법, 교회와 대중에 시사
▲ 김우선 신부
이 글은 시민사회의 건설이란 측면에서 김수환 추기경의 민주화에 대한 공헌을 강조하고자 한다.
특히 시민사회의 도덕적 측면인 시민성이라는 개념을 중심으로 김 추기경의 행동양식을 검토함으로써, 그가 단지 독재에 대한 저항과 권위주의 체제의 해체라는 측면에서만 공헌한 것이 아니라, 민주적 가치와 실천의 건설이라는 측면에서도 공헌하였음을 보여주고자 한다.
▲ 시민사회, 시민성, 그리고 교회
종교는 권위주의 국가에 대한 저항에 의해 시민사회의 소생에 공헌할 수 있을 뿐 아니라, 시민성이라는 공공도덕과 공공문화의 함양에 의해 시민사회의 성숙에 기여할 수 있다.
▲ 바티칸공의회와 개발독재
김수환 추기경의 리더십은 교회 내적인 측면에서 제2차 바티칸공의회와, 교회 외적인 측면에서 한국사회의 개발독재를 떠나서 이해하기 어렵다.
김 추기경의 사상과 사목적 리더십, 사회활동에 있어서 공의회의 영향은 결정적이다.
그는 ‘교회는 교회 자신을 위해서가 아니라 세상의 유익을 위해 존재한다’는 확신을 제2차 바티칸공의회로부터 얻었다. 그의 ‘공의회 정신 적극 수용’은 사회에 대해 초연하던 한국교회가 역사 속의 교회로 궤도 수정하게 되는 계기가 된다.
김 추기경의 주교직 수행은 경제발전과 정치적 민주화를 두 축으로 하는 한국현대사 안에서 이뤄졌다.
‘세상을 위한 교회’라는 제2차 바티칸공의회 정신을 구현하기 위해선 ‘경제발전과 민주화’라는 투쟁의 역사 한복판을 피해갈 수 없었다. 노동자, 농민, 도시 빈민 등 사회적 약자의 존엄성과 기본권을 보장하려는 김 추기경의 노력이 권위주의 정권과 충돌한 것은 당연한 귀결이었다.
▲ 김수환 추기경과 시민사회
김 추기경은 권위주의 국가에 대해 저항함으로써 시민사회의 자율성을 확보하는 디딤돌이 됐다.
반체제 인사를 위한 피난처 역할을 하기도 했고, 가톨릭노동청년회나 가톨릭농민회 등 교회와 연관된 시민단체를 조직함으로써 민주화운동을 조직적으로 지원하기도 했으며, 국제적 압력을 이끌어내는 통로가 되기도 했다. 이로써 그는 종교의 사회운동 가능성을 실현했다고 할 수 있다.
김 추기경에게 ‘사회적 약자에 대한 옹호’는 독재에 대한 저항과 마찬가지로 ‘세상 안에서 세상을 위한 모든 이를 위한 교회가 돼야 한다’는 공의회 정신을 수용하는 길이었다.
김 추기경의 관심이 된 사회적 약자는 역사적 맥락을 따라 변해왔다. 본당 신부 시절 그는 본당의 가난한 이들을 돕고자 했고, 독일 유학 시절에는 한국인 광부와 간호사와 가까이 지냈으며, 가톨릭신문사 사장 시절에는 행려병자와 장애인을 수용하는 복지시설에 자주 들렀다. 주교가 돼서는 한국의 산업화와 고도 경제성장이 남긴 노동자, 농민, 도시빈민이라는 소외계층에 주목했다. 80년대 후반 이후엔 새로운 쟁점으로 떠오른 외국인노동자를 지원하기도 했다.
김 추기경은 좋은 사회의 중심 덕목인 ‘남에 대한 존중’에 뛰어난 리더십을 발휘했다. 그의 신학과 사목에서 인간은 항상 중심을 차지하고 있었고 모든 인간은 인간이기에 존중 받아야 한다는 가톨릭의 입장을 굳게 견지했다.
독재에 대한 저항과 사회적 약자에 대한 옹호는 여기에서 비롯된 것이다.
김 추기경의 이러한 리더십은 우리나라와 비슷한 민주화와 전환을 겪은 동구권 교회의 리더십과 비교해볼 수 있다. 김 추기경은 세상을 위해 존재하는 교회를 구현하기 위해 사회적 이슈에 개입하는 측면 외에도 ‘남에 대한 존경’이나 ‘남에게 경청하며 기꺼이 배우려는 시민성’을 실천했다는 측면에서 공의회 정신을 구현했다고 평가할 수 있다. 이는 민주화로 이행한 사회에서 시민사회의 건설에 중요한 덕목과 기술이 되는 것이다.
▲ 나가는 말
1980년대까지 가톨릭은 한국에서 소수종교였다는 점을 생각하면 김수환 추기경의 도덕적 권위나, 그에 대한 사람들의 존경심은 교회가 부여한 대주교나 추기경이라는 그의 위치에서 나온 것만이 아니라, 오히려 그가 보여주었던 종교나 영적인 영역을 뛰어넘는 공공의 리더십에서 나온 것이다.
사람들은 당대 지도자들이 침묵할 때 그가 보여준 독재정권에 대한 반대나, 일생을 두고 실천한 사회적 약자에 대한 옹호, 그리고 ‘남’에 대한 존중과 개방에서 드러난 시민성을 통해 종교를 넘어서는 공공의 리더십을 본 것이다.
김 추기경의 주교직 수행 기간 동안 한국교회는 소수종교에서 영향력있는 주류 교회로 변모했다. 이런 변화는 교회구조의 관료제화를 동반했으며, 이에 따라 교회 조직의 경직화가 본연의 사명과 충돌하는 현상을 겪기도 했다.
21세기 한국은 이데올로기와 계급, 성에 의해 분절화되고 여기에 인종과 에쓰니시티(Ethnicity)라는 새로운 범주에 의한 분절화가 더해지고 있다. 이런 사회 속에서 우리는 모두의 공동선, 특히 새로운 약자의 존엄성과 권익을 제쳐버리는 문화 속에 살고 있다.
포용과 사회적 약자를 위한 삶에 목마른 한국사회에서 그 누가 권력의 남용에 저항하고 원수에 대한 미움에 저항하며, 갈라진 세상을 위해 고민할 것인가?
김 추기경에 대한 기억과 추모는 갈라진 세계를 사는 가톨릭 신자뿐만 아니라 한국인 모두에게 이런 따가운 물음을 남긴다.
■ [주제 토론]
“김 추기경 기억하며 바른 소통 시작해야”
▲ 주제 토론 참가자들 왼쪽부터. 한수산(소설가·세종대 교수), 박일영(가톨릭대 교수), 노길명(고려대 명예교수), 김경재(한신대 명예교수), 조광(고려대 명예교수), 강대인(대화문화아카데미 원장), 덕현(길상사 주지 스님), 박남수(천도교 선도사).
▲ 강대인(대화문화아카데미 원장)
교회는 이웃종교를 비롯해 교회의 생명성과 영성이 시민사회에 스며들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한다.
또 교회는 ‘돈보다 생명을! 다시 인간화를!’을 외친 김수환 추기경처럼, 한국사회를 향한 근본적인 물음을 던져야 한다.
정치적 억압으로 언로가 차단, 과장, 왜곡돼 있던 시절, 강단을 통한 강론으로 때로는 위정자와 때로는 힘없는 이들과 직접 부딪쳐 대화하면서 온몸으로 바른 소통을 해가던 용기와 지혜 그리고 언어력은 살아있는 바른 언론이었다. 우리가 김 추기경님을 기리며 다시 시작할 일은 형제에 대한 사랑의 내면화와 바른 소통을 하는 훈련이다.
▲ 김경재(한신대 명예교수)
김수환 추기경은 격동하던 광기의 시대인 한국의 20세기 후반기에 지도력을 발휘한 한국사회 유일한 ‘목자’였다는 김형석 교수의 말에 전적으로 동의한다. 그는 또한 ‘전체사회와 국가발전’의 이름으로 양심·정의·약자의 인권이 무시되던 시대에 ‘거룩한 분노’를 발할 줄 아는 ‘행동하는 양심’이었다.
김수환 추기경은 우리에게 산업화, 민주화, 정보화, 선진화 등 그 어떤 국가사회목표나 사회의 공동목표일지라도 ‘사람답게 사는 것, 사람답게 되는 일’보다 더 중요한 가치는 없다는 가르침을 유산으로 남겨주셨다. 그 가르침은 즉 ‘산업화·민주화는 인간화의 형식이고, 인간화는 그것들의 실체다’라고 명제화할 수 있겠다.
▲ 노길명(고려대 명예교수)
김수환 추기경의 가장 큰 업적은 권위주의체제 아래에서 독재정권에 대한 반대, 사회적 약자에 대한 옹호를 통한 인간 존엄성과 인권의식의 신장, 사회정의의 원칙 확립, 공동선의 규범화 등과 같은 사회참여 활동을 통해 도덕적 권위를 확보했다는 점에서 찾을 수 있을 것이다.
발제자는 시민사회론의 입장에서 시민사회의 형성에 필요한 자율적인 공적 영역의 확립과 ‘시민성’ 건설이라는 측면에 기여한 김 추기경의 역할을 검토하는 데 주목하고 있다.
이러한 접근은 오늘의 한국사회에서 필요한 가치와 그에 대한 교회의 역할을 모색하는데 도움을 주리라 여겨진다.
▲ 박남수(천도교 선도사)
김수환 추기경의 사회개혁을 위한 노력은 지난 시기 천도교가 추구한 사회개혁과 일맥상통하는 부분이 있다고 생각한다.
김 추기경의 사회를 향한 양심발언은 민주주의를 지탱하는 큰 힘이 됐고, 더불어 그러한 가톨릭교회의 목소리가 곧 시민사회의 안정을 도왔으며, 이를 통해 시민의식의 성장과 발전이 가능했다. 결국 지난 시간 국가 발전의 지향점을 설계하는데 김 추기경과 가톨릭교회가 큰 공헌을 했다고 할 수 있다.
김 추기경은 또한 특별히 종교를 넘는 폭넓은 사고와 활동에 대해 관심이 많은 성숙한 다종교사회의 디딤돌이 된 분이다. 김 추기경은 가톨릭을 넘어 다른 종교, 그리고 사회 전체의 큰 지도자였다.
▲ 박일영(가톨릭대 종교학과 교수)
오늘날 한국의 가톨릭교회는 자족하는 경직된 구조로부터 탈피해 자기중심적인 자만심에서 벗어나 현대사회의 요구에 올바로 대처해야 하는 중요한 시기에 처해있다. 이런 시기에 김수환 추기경의 사상과 영성을 살펴보는 일은 시의적절하다고 본다. 하느님과 그리스도에 근거를 둔 인간 이해, 특히 제2차 바티칸공의회의 개방 정신에 바탕을 둔 김 추기경의 사상과 영성에 대한 이해의 시도는 ‘공정한 사회’를 화두로 오늘날 요청되는 성숙한 시민사회를 향한 방향과 목표를 제시하는 데 있어 나침반 역할을 할 것으로 기대된다.
▲ 한수산(소설가·세종대 교수)
김수환 추기경의 삶이 가지는 교회사적 의미와 그 영성이 이제부터 우리 사회 안에 어떻게 자리매김하도록 해야 할 것인가 하는 문제에는 보다 겸허한 접근과 다양한 시각이 필요하다.
‘성인추대론’ 등 김 추기경 선종 후 우리 사회가 보여주고 있는 김 추기경에 대한 우상화에 가까운 현실은 그 정도가 우려와 당혹감을 느끼게 한다. 김 추기경도 ‘하느님은 어디에 계신가’하는 믿음의 원형에 번민했다는 ‘사실’도 김 추기경의 영성을 올바르게 이해하는 길의 하나가 아니겠는가.
지나치게 감성적인 호소력에 의존해 접근하거나 종교적 권위, 도덕적 권위를 앞세우기 보다는 김 추기경에 대한 이성적 연구와 검토가 이뤄져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