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씨시의 성 프란치스코 만큼 많은 이들에게 알려지고 사랑 받는 성인이 없다고 할 만큼 그는 다양한 종교와 이념 그리고 다양한 민족과 계층의 사람들에게 존경과 사랑을 받아왔으며 지금도 그러하다. 그가 태어났고 살았으며 그가 세운 수도원이 있고 그의 유해가 안치되어 있는 아씨시에 그가 죽은 지 700여 년이 지난 오늘도 매일 전 세계에서 수많은 참배객이 몰려오고 있다.
외적으로 왜소하고 보잘 것 없어 보이는 낡은 수도복을 걸치고 초라한 걸인 행세를 하면서 복음을 선포하던 프란치스코가 오늘까지 사람들의 마음에 그토록 깊은 감명을 주며 존경과 사랑을 받을 수 있게 하는 매력은 어디에 있는 것일까? 그것은 하느님의 은총에 협력하면서 그가 가꾼 고유한 영성이 아닐까? 그렇다면 그의 영성은 어떠한 것인가?
1. 성인의 생애
성인은 이탈리아의 움브리아 지방 아씨시에서 1182년에 부유한 포목상을 하던 아버지 베드로 디 베르나르디네와 어머니 요안나의 맏아들로 태어났다. 그는 「요한」이라는 이름으로 세례를 받았지만 아버지가 곧 그의 이름을 「프란치스코」(프랑스인)로 바꾸었다. 그 이유는 장사일로 자주 왕래했으며 부인을 만났던 프랑스를 매우 좋아했기 때문이라고 전해진다.
젊은 프란치스코는 라틴어, 프랑스어 등 언어 공부와 함께 신분에 걸맞은 교육을 받아 상당한 지식을 갖추었다. 성격이 매우 활달한 그는 동네 청년드로부터 두목으로 지명되어 앞장서 활동하기도 했으며 경제적으로 낭비하고 사치하는 방종적 경향을 드러내기도 하였다. 한편 그에겐 타고난 인정과 관대한 마음이 있어 가난한 이들을 동정하며 자주 도와주기도 하였다.
그는 1202년 아씨시와 페루지아 간의 전쟁에 가담하여 싸우던 중 포로가 되었고 다음 해 두 도시간의 평화 조약이 체결되면서 풀려나 아씨시로 돌아왔다. 그 영향으로 그는 얼마간 병석에 누워있었는데 이 때에 그의 마음에 무언가 분명치는 않으나 어떤 변화가 일기 시작하였다. 1205년 그가 23세 되던 해 다시 기사가 될 마음으로 갈티에르 브리에네 백작 군에 입대하였다.
그러던 어느 밤 스폴레토에서 환시와 함께 메시지를 듣게 되는데 이로써 기사의 꿈을 버리고 집으로 돌아 왓다. 그 환시 중 듣게 되는 메시지는 다음과 같은 내용을 담고 있다. 『왜 주인을 섬기지 않고 종을 섬기려느냐? … 집으로 돌아가라. 내가 할 일을 알려주겠다』
1206년 성 베드로 대성전을 순례하고 돌아오는 길에 나병환자를 만나 입맞춤 한 체험은 그의 생애에 일대 전환점을 이룬다. 그는 가난한 이들에게 가진 것을 나누어주는 희사를 하였고 자주 기도하는 생활을 하게 되었다. 어느 날 폐허가 된 성 다미아노 소성당에서 자신이 무엇을 해야 할지 인도해 주시길 주님께 기도하고 있을 때 계시를 받게 된다. 그 성당의 십자가에서 『프란치스코야, 허물어져 가는 나의 집을 고쳐 세워라』하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는 고쳐야할 집이 그 소성당이라는 것을 알아채고 집에 가서 귀중품을 팔아서 그 돈을 성당의 책임 신부에게 내놓았다. 이 사실을 알게 된 그의 부친은 그를 작은 방에 가둘 정도로 분노하였다.
이 사건 후에도 프란치스코가 가난한 이들에게 재산을 나누어 주려는 뜻을 굽히지 않으므로 아버지는 아씨시의 주교에게 그를 데리고 가 그의 재산 상속권을 포기하도록 하고 그가 지닌 모든 것을 돌려 받으려 하였다. 프란치스코는 그 요구를 거부하거나 저항하지 아니했고 오히려 기꺼이 응하며 입었던 옷까지 모두 벗어 아버지에게 넘겨주고 알몸이 되었다. 그러자 주교는 크게 감격하여 그를 끌어안고 걸쳤던 외투로 그의 몸을 감싸주었다. 그가 청빈을 귀하게 여기게 된 것은 그때부터였다.
그는 아무것도 소유하길 원치 않았고 곡 필요한 의복도 되도록 남루한 것을 걸쳤다. 그후 1년이 지난 1208년 2월 24일 폴치운쿠라 성당에서 미사 참례 중 다음과 같은 마태복음 10,9-10의 말씀을 들으며 그것을 자신의 삶의 규범으로 주시는 계시로 받아 들였다. 『여러분은 전대에 금도 은도 동정도 지니지 마시오. 길을 떠날 때에 속옷 두 벌도 신발도 지팡이도 지니지 마시오』
그는 곧 뜻을 같이하는 12명의 동료들과 함께 리보트로트에서 기도와 노동을 하면서 극도의 가난 생활을 하였다. 1209년 프란치스코는 동료들과 함께 하던 생활 양식을 인준해 주도록 교황에게 요청하였다. 그것이 너무 엄격하다고 여긴 교황 친노첸시오 3세는 처음엔 주저했으나 얼마 후 그 회칙을 구두로 인준해 주었고 그들에게 설교할 사명까지 맡겼다. 그것은 교황이 프란치스코가 쓰러져 가는 성전을 떠받치고 있는 모습을 꿈에서 보게 되어 그것을 하나의 영감으로 받아들였기 때문이라고 전해지고 있다.
그들은 아씨시 근처에 있는 폴치운쿠라소 성당과 토지를 베네딕도 수도회로부터 얻어 「작은 형제회」라는 수도원을 세웠다. 그들은 복음말씀(마르 6,7-12 참조)에 따라 둘씩 짝을 지어 움브리아 지방의 여러 마을들을 돌아다니면서 복음을 전했다. 그들의 공동체는 날로 그 구성원 수가 늘어나서 여러 곳에 분원들이 생겼고 그들의 청빈 생활은 많은 이들에게 감명을 주었다.
아씨시의 명문가 출신 글라라도 프란치스코의 삶과 설교에 깊은 감명을 받아 그의 제자가 되고자 하였다. 프란치스코는 다미아노 성당 곁의 집 한 채를 글라라에게 주어 뜻을 같이 하는 여성들이 모여 공동체를 이루도록 하였고 그들을 위해 생활규칙을 만들어주었다. 이 수도공동체는 「글라라회」라고 불리는데 프란치스코가 세운 「제2회」이다.
프란치스코는 그의 청빈 정신에 공감하면서도 그의 형제들처럼 완전한 가난 생활을 실천할 수 없는 사람들을 위하여 「제3회」를 설립하였다. 사회의 어느 직업에 종사하든지 실천할 수 있는 회칙을 만든 것이다. 사제들을 포함하여 빈부 귀천에 관계없이 다양한 계층의 많은 신자들이 그 회원이 되었다.
1216년 프란치스코는 수도회의 기능을 원활히 하기 위하여 몇 개의 관구로 나누었다. 그리고 1217년과 1219년의 총회에서는 형제들을 선교사로 외국에 파견하기로 결의했고 분원들을 세우며 설교하도록 했다. 프란치스코는 순교를 열망하며 이집트로 가서 술탄과 회교도들에게 복음을 선포하여 개종시키려 했으나 뜻을 이루지 못한 채 이탈리아로 돌아왔다. 이집트에서 돌아온 후 그는 총장직을 사임하였다.
교황으로부터 구두로 인준되었던 「작은 형제회」의 생활 양식을 23장으로 증보 개정하여 승인 요청을 했으나 반송되었고 다시 보완작업을 통해 이루어진 12장의 회칙이 드디어 1223년 11월 29일 호노리오 3세로부터 인준되었다.
1224년 그는 베르나 산에서 그리스도의 수난을 묵상하면서 그 고통에 참여할 수 있길 청원하던 중 오상(五傷)의 선물을 받았다. 그것은 그에게 큰 은총의 선물이었으나 심한 고통의 시련이기도 했다. 그러한 중에도 그는 설교를 계속하였고 몸은 날로 쇠약해졌다. 1226년 9월 이 세상에서의 마지막 순간이 가까이 다가 온 것을 예감하면서 머물고 있던 아씨시에서 폴치운쿠라에 옮겨주기를 부탁하였다. 그곳에 도착한 지 얼마 후인 10월 3일 저녁 무렵 그는 자신을 맨 땅에 누여 주길 요구했다. 십자가상 그리스도와 같이 완전한 가난 중에 임종을 맞이하고 싶어서였다.
그는 예수 수난에 관한 성서말씀을 읽게 하고 그것이 끝나자 시편 141편을 읊었다. 그리고 그가 지은 「태양의 찬가」를 외우며 모든 피조물과 함께 하느님을 찬미하였다. 그는 이어서 죽음을 찬미하도록 하였고 하느님께 인도해 줄 죽음을 기쁘게 맞이하였다. 프란치스코는 세상을 떠난 지 2년이 채 안된 1228년 7월 15일 교황 그레고리오 9세에 의해 시성되었다.
가장 많이 본 기사
기획연재물
- 길 위의 목자 양업, 다시 부치는 편지최양업 신부가 생전에 쓴 각종 서한을 중심으로 그가 길 위에서 만난 사람들과 사목 현장에서 겪은 사건들과 관련 성지를 돌아본다.
- 다시 돌아가도 이 길을한국교회 원로 주교들이 풀어가는 삶과 신앙 이야기
- 김도현 신부의 과학으로 하느님 알기양자물리학, 빅뱅 우주론, 네트워크 과학 등 현대 과학의 핵심 내용을 적용해 신앙을 이야기.
- 정희완 신부의 신학서원어렵게만 느껴지는 신학을 가톨릭문화와 신학연구소 소장 정희완 신부가 쉽게 풀이
- 우리 곁의 교회 박물관 산책서울대교구 성미술 담당 정웅모 에밀리오 신부가 전국 각 교구의 박물관을 직접 찾아가 깊이 잇는 글과 다양한 사진으로 전하는 이야기
- 전례와 상식으로 풀어보는 교회음악성 베네딕도 수도회 왜관수도원의 교회음악 전문가 이장규 아타나시오 신부와 교회음악의 세계로 들어가 봅니다.
- 홍성남 신부의 톡 쏘는 영성명쾌하고 논리적인 글을 통해 올바른 신앙생활에 도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