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사는 교회의 기원과 지난 2000년 동안 교회가 시간과 공간을 통한 교회의 발전을 말하는 것으로 옛날 이야기 같은 허무맹랑한 이야기가 아니다. 그리스도교는 깨달음만 추구하는 관념의 종교가 아니라 인간이 되어 오신 예수 그리스도의 역사적 실재에서 시작하는 역사종교이므로 교회사는 구원의 역사이다. 따라서 신앙의 교회와 역사의 교회가 하나인 실체라면 2000년 교회사는 구원사의 모든 해답을 담고있는 신앙의 보고이다. 새로운 천년기를 맞으면서 구원을 위한 보물창고 2000년 교회사를 열어본다.
고대교회
교회사는 기원 30년 경의 성령강림으로 시작되는데 이는 이때부터 교회의 공식활동이 시작되는 때문이고 성령강림이 33년이 아닌 30년 경으로 보는 것은 서력의 잘못된 계산 때문이다. 교회창립 직후 예루살렘에 최초의 유대인 그리스도교 공동체가 생기고 이 공동체의 성장에 놀란 유대교 지도자들에 의해 33~34년경 최초의 박해가 일어나 스테파노 등이 순교한다. 이어 거듭된 박해로 베드로 사도가 예루살렘을 떠나고 야고보 사도 등이 순교함으로써 예루살렘 교회는 그 중요성을 잃고 만다.
그러나 박해를 피해 예루살렘을 떠난 신자들과 사도들은 사방으로 흩어져 신앙을 전하게 됐다. 이리하여 안티오키아에도 교회가 탄생하게 된다. 복음은 그리스, 로마 세계로까지 전파되는데 복음의 전파로 이교세계와 마찰이 생기고 그 결과 박해가 일어난다.
로마제국의 박해는 64년에 시작해 신앙의 자유가 허용되는 313년까지 계속됐다. 로마시대의 기나긴 박해는 수많은 순교자를 낳았지만 「순교자의 피는 신자들의 씨앗」이라는 떼르뚤리아노의 말처럼 순교자의 피가 복음의 동인이 되어 박해가 끝나갈 무렵인 300년경 로마 제국의 신자는 인구 5000만명중 800만에 이르게 됐다.
혹독했던 박해시대는 콘스탄티누스 황제의 313년 밀라노 관용령으로 끝이 나고 신앙의 자유를 얻기에 이를 뿐만 아니라 국가의 옹호 아래 급성장하면서 테오도시우스 황제에 이르러서는 유일한 공인 종교로 인정돼 사실상 국교가 됨으로써 제국교회가 된다.
박해받는 교회에서 특권을 누리는 교회로, 순교자의 교회에서 국가교회로 전환되면서 교회는 새로운 국면을 맞이하게 되는데 국가교회로서의 많은 이점 뒤에는 황제가 공의회를 소집해 교리 문제에 간섭하는 등 폐해도 컸고 헌신적이었던 순교자 시대와는 달리 이름 뿐인 신자들이 대중을 이루게 되어 교회의 속화 위험도 커져 많은 이단과 이교들이 발생했다. 제국교회 시기 그리스도교는 여러 부분에서 발전하는데 첫째로 수도원이 창설되어 발전하면서 영성생활에 도움을 주었고 신앙생활의 활성화와 함께 전례가 발전했으며 이단과의 격렬한 교리 논쟁으로 교리가 정립되는 역사를 가져왔다.
중세교회
375년 훈족의 침입으로 시작돼 근 2세기에 걸친 민족대이동은 교회활동의 범위를 확장했다. 특히 4세기 북부 갈리아에 진출한 프랑크 족의 클로비스왕이 496년 세례를 받음으로써 장차 서양을 지배할 프랑크족이 개종하게 돼 같은 신앙 안에서 일치된 중세 서구 그리스도교회의 기틀을 마련하게 된다. 이러한 프랑크 왕국과의 제휴는 754년 스테파노 2세 교황과 피핀 왕과의 동맹으로 이어졌고 마침내 787년 카알대제에 의해 교황령이 탄생하게 된다. 이후 교황령은 1870년까지 11세기 동안 교황직 발전의 기초를 놓는데 기여했지만 본연의 교회 사명을 위해서는 무거운 짐이 되기도 했다.
이 시기 교회가 물질적 혜택을 받는 반면에 황제의 내정 간섭을 받아 세속화와 교권의 약화를 초래했을 뿐 아니라 교회가 국가와 밀착 관계를 유지한 탓으로 프랑크 제국이 몰락하자 교회의 권위와 교황의 권한이 함께 쇠퇴하는 교회의 암흑기를 맞이하기도 한다.
아울러 330년 제국의 동서분할, 교리 논쟁 등으로 대립해오던 서방라틴교회와 동방비잔틴 교회가 성화상 공경을 둘러싸고 대립하다 1054년 완전히 결별하는 동방대이교 사건이 발생한다. 그러나 황제의 권력에 눌려 교권이 자율권을 얻지 못하던 이 암흑기에도 세속권력으로부터 교회를 해방시키기 위한 개혁이 진행된다. 클뤼니 수도원과 그레고리오 개혁이 그것으로 이 개혁을 통해 중세교회는 전성기를 맞이하게 된다.
이 개혁은 교권과 속권의 우위 투쟁으로 집약할 수 있는데 당시 세속권력이 성직서임권마저 갖고 있어 성직매매, 사제 결혼 등 엄청난 폐해를 낳고 있었다. 그레고리오 교황은 이를 근절시키기 위해 각종 조치를 취하는 한편 1075년 좧교황권의 지상론좩 을 공포, 황제도 신자로서 교회에 복종해야 한다고 밝혀 황제와 충돌하기도 했다. 그레고리오 7세의 개혁운동은 성직자와 수도자를 각성시켰고 평신도 영성강화에 커다란 영향을 미쳐 11세기에 시작된 십자군 운동과 청빈운동을 불러 일으켰다. 8회에 걸쳐 200년간 지속된 십자군운동은 비복음적 행동이 많고 성과가 미미했음에도 불구하고 서구 비잔틴문화와 이슬람문화의 접촉을 가능케함으로써 찬란한 중세 예술과 학문 특히 스콜라 철학과 신학의 발전에 이바지했다. 청빈운동은 교회의 생활혁신을 불러 일으켰으나 지나친 주장으로 이단으로 변질되기도 했으며 이를 저지하기 위해 종교재판이 생겨나기도 했지만 탁발수도회의 창설을 가능케했고 수도생활의 번창 으로 신앙생활이 더욱 풍요로워지기도 했다.
그러나 13세기 이후 신흥국가의 탄생과 왕권의 강화로 교황권이 다시 쇠퇴하기 시작해, 로마귀족 들이 교황파와 반교황파로 갈라져 정치싸움을 하자 로마정세에 불안을 느낀 프랑스인 교황 글레멘스 5세는 교황에 선출된 후 아예 로마로 가지않고 아비뇽에 정착하고 말았다. 이후 6명의 프랑스인 교황이 아비뇽에 체류하는 동안 교황은 프랑스의 압력을 받아 프랑스 왕권의 정치도구 노릇을 하게 됐다.
이에 대립교황의 연이은 등장으로 교회가 혼란과 분열에 쌓이기도 했는데 이러한 교황권의 약화는 14세기 이후 인간중심사상을 강조한 인문주의 등 서구 정신의 대변동을 낳았다. 약화된 교황권과 변화한 서구 정신 속에서 세속생활과 미신적 신심에 물든 종교생활은 결국 프로테스탄트 개혁(종교개혁)의 빌미가 되기도 했다.
근세교회
교회역사에 있어서 중세교회를 마감하는 계기는 프로테스탄트 개혁이었다. 역사적으로 교회가 속화된 모습을 보일 때마다 내부에서 개혁의 외침과 쇄신의 움직임이 있어왔지만 프로테스탄트 개혁은 1500년 동안 보전되어온 그리스도교 신앙을 근본적으로 뒤흔들어 놓고 교회를 또 한번 갈라놓는 사건이었다.
인문주의 사상의 대두라는 사상적 원인과 신성로마제국의 무력화와 제후들의 영향력 강화라는 정치적 원인, 기사 계급과 농민계급의 불만이 팽배한 사회 경제적인 원인 등이 복합된 이 프로테스탄트 개혁은 근대 자본주의를 촉진시켰으며 가톨릭교회의 쇄신운동을 심화 시키기도 했다. 그 결과 1545년 트리엔트 공의회가 개막돼 그동안 누적되어온 악폐들을 시정하도록 구체적인 개혁지침을 확정, 실시해 혼란의 시기를 마감했고 항상 교회분열의 위협적 요소였던 교의적인 문제와 규범들을 명확히 하여 교회일치를 강화 했다.
또한 트리엔트 공의회 이후 아빌라의 데레사, 십자가의 요한, 로욜라의 이냐시오 등 수많은 성인이 출현하면서 교회는 다시 한번 새롭게 태어나게 된다. 이와 함께 「유럽의 종교」로 머물러 있었던 가톨릭 교회는 당시 지리적 발견과 유럽각국의 해외 영토확장을 위한 식민정책에 동반해 세계전교에 나서게 됨으로써 새로운 선교시대를 맞게 된다. 이로써 아프리카, 아메리카, 아시아 지역에도 복음이 전파되면서 한국에도 천주교가 창립될 수 있는 계기가 마련된다.
1789년 발발한 프랑스 혁명은 교회사에 또한번의 전환기를 가져오는데 교회 재산의 국유화, 각종 교회 특권의 상실 등은 유럽지역에서 가톨릭 교회가 권위를 상실하고 세속화되는 계기를 가져 왔다. 그러나 교회에 폐해를 가져온 교회사의 모든 사건이 그러하듯 프랑스 혁명도 교회가 자각할 수 있는 계기가 되어 교회의 정화와 함께 신심생활이 활성화되고 주교단과 교황청이 밀접한 관계를 유지 하게 되어 반가톨릭 사회에서 단결하였고 국가 지상주의에 강력하게 도전하는 운동을 일으켰다. 이 시기의 새로운 사상에 힘입은 각종 학설로부터 정통교리를 수호하기 위해 소집한 1차 바티칸 공의회는 교황의 수위권과 무류권에 대한 신조 결정을 통해 교황의 권위를 회복했고 산업혁명으로 변화된 환경에 적응하려는 교회의 노력은 교황 레오 13세의 노동헌장 반포로 나타나 교회가 소외된 이들의 권익, 즉 사회현실 참여에 적극적으로 눈뜨는 계기가 됐다.
현대교회
이후 제1차 세계대전을 거치면서 교회는 공산주의의 위협에 맞서 보수화 정책을 일관하며 현대화를 거부하다 요한 23세에 의해 제2차 바티칸공의회가 개막돼 교회밖의 세계에 문호를 개방하고 갈라진 형제들에게도 우호적인 태도를 보이는 또 하나의 역사적인 전환기를 맞이하게 된다. 제2차 바티칸공의회에는 전 세계 주교들이 참석함으로써 가톨릭 교회가 유럽 중심의 교회가 아니라 세계교회로서의 본 모습을 나타내게 되고 교회 내적으로는 쇄신을 새로운 세계에는 적응을 추구함 으로써 「쇄신과 적응」이라는 현대교회의 기본적인 사목정신을 이끌어 냈다.
이러한 사상은 교황 요한 바오로 2세가 전 세계교회를 순방하는 모습에서 잘나타나고 있으며 같은 연장선상에서 1983년 새교회법이 공포되고 1984년 발효됐다.
20세기는 또한 성직자 중심의 교회 체제에서 벗어나 평신도의 지위와 사명이 부각돼 평신도 신학이 정립되어 성직자와 평신도가 교회에 대해 다함께 책임을 지는 그리스도교 공동체로 전환하고 있다. 그리고 1999년 12월 24일 대희년의 개막으로 인류의 구원을 향한 교회의 순례길은 3천년기 새 세기에도 변함없이 계속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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