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괄호 열고 3X 더하기 Y 괄호 닫고는 X마이너스 Y…』『아시겠죠. 저기 조는 학생 세수하고 오세요』
훤칠한 키에 말라보이는 몸매 때문인지 어딘가 모르게 연약한 느낌을 주는 김영환(요셉·37)씨. 키가 커서 그런지 조금은 휘청거리는 몸짓이지만 말투 하나하나엔 힘이 들어가 있고 반짝이는 눈빛엔 진지함이 가득 서려있다. 학생들의 배움에 대한 욕구에 응답하는 김씨의 노력엔 어디 하나 소홀함이 없는 듯 하다.교실은 금방 지적인 열기로 다아올라 한겨울밤 추위의 매서움도 「저리 가라」한다.
수업에 참가한 학생들도 각양각색, 수학을 공부하면 치매가 예방된다는 말에 나왔다는 칠순된 할머니. 초등학교 밖에 못나와 공부를 더하고 싶은 욕망이 항상 가득했다는 아주머니. 자녀를 가르치려는데 옛날 배운 것이 생각이 안나 나온다는 아저씨. 이젠 야학도 검정고시를 준비라는 근로청소년들의 전유물도 아닌 듯 하다.
『자꾸만 처지는 눈을 밀어 올리며 저를 응시하는 학생들을 보면 「대충하겠다」는 생각이 싹 사라지죠. 열번, 스무번이라고 그들이 이해할 때까지 설명해줘야 제 마음이 후련하답니다』
김씨가 야학 학생들에 대해 갖고 있는 애정을 엿볼 수 있는 말이다.
우리나라 야학의 역사는 1900년대 초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1904년 박은식은 「학규신론」을 통해 학교교육을 받을 수 없는 빈민의 자녀를 위해 야학 개설을 주장하고, 모든 국민이 교육을 받아야 한다며 야학제도의 확립을 건의했다. 이렇게 애국계몽운동의 일환으로써 노동자와 빈민의 자녀들을 대상으로 민족의식과 사회의식을 고취시키려는 계몽주의적 야학이 우리나라 야학의 시초라 할 수 있다. 현재 국내 야학 수는 20여개. 이러한 야학들은 여러 지역에서 제도권 교육에서 소외된 이들을 위한 교육의 장으로 여전히 큰 몫을 담당하고 있다.
김영환씨가 대구 범어본당 부설 야학인 「화선(和善)학교」(교장=강택규 신부)에서 이렇게 봉사한 지는 벌써 11년째. 소외받고 있는 이들과 함께 해보고 싶다는 일념으로, 대학 졸업반부터 시작한 「야간학교 선생님 노릇」에 시간가는 줄 몰랐다고 한다. 평교사로 봉사하다 교감직을 맡은 지는 7년째.
사실 김씨는 화선학교 창립의 또다른 주역. 88년 당시 본당을 관할하던 아씨시의 성프란치스코회 수사신부들이 「그리스도의 사랑과 프란치스코 성인의 가르침을 실천」하고자 야학을 설립한다며 동참을 요구했을 때 선뜻 응함으로써 그의 「야학인생」이 시작된 것. 한때 건강이 안좋아 「절망적이다」라는 진단을 받기도 한 그는 「하느님의 힘으로 완쾌」된 후 교회 안에서 더 열심히 봉사하게 된다.
청년회장, 교리교사 회장 등을 역임한 김씨는 지금은 불로본당 주일학교 교장을 맡고 있기도 하다.
『「하느님께서 덤으로 주신 삶을 어떻게 살아가야 할 지」곰곰히 생각해 봤죠. 역시 소외된 이, 고통받는 이들과 함께 하는 삶만이 이러한 주님의 사랑에 보답하는 길이라는 결론이 났습니다』
경산대 한의대 출신인 김씨는 화선학교가 방학을 할 때마다 학생들과 함께 무의촌 등지서 의료봉사활동을 하느라 「자기만의 휴가」는 생각도 못한단다. 또 정기적으로 사회복지시설인 성심복지원에 가서 무료진료도 해준다.
김씨에겐 자기자신만의 시간 뿐만 아니라 가족과 함께 할 수 있는 시간도 거의 없다. 부인 김효연(아나다시아)씨 사이에 충윤(바오로·9)과 정윤(대건안드레아·6) 형제를 두고 있는 김씨는 그래도 『하느님 일을 한다는 생각에 이러한 인간적인 욕심들을 뒤로 미룰 수 있다』고 확언한다.
김씨는 자신의 진로에 큰 영향을 끼친 사람으로 이성우 신부와 안현철 신부를 꼽았다.
『어릴적 꿈은 신부님이 되는 것이었죠. 당시 경주본당 주임이던 이성우 신부님의 좋은 표양들이 어린 저의 마음을 흔들었죠. 프란치스코 수도회 안신부님은 「청빈」과 「가난」을 가르쳐 주신 분입니다. 실질적으로 야학에서 조그마한 나눔이라도 실천할 수 있도록 이끌어 주신 분이죠』
화선학교의 주된 운영 경비는 본당 보조금. 98년부턴 수성구청 지원금도 약간은 받고 있긴 하나 많이 부족한 편. 교사회식이나 각종 학교행사 등 여러군데 돈들어갈 곳은 많지만 재원이 없어 어려움을 겪을 때가 많단다. 김씨는 이러한 「애로사항」을 없애주는 해결사 역할도 톡톡히 해야만 했다. 89년에 한의대를 졸업한 김씨는 2년간 「월급 한의사」생활을 한 후, 91년 불로동에 세내어 한의원을 개원했다.
『지금 살고 있는 집도 전세이지만 마음만은 풍요롭다』고 말하는 김씨. 그는 『앞으로도 「나눔의 삶」,「가난을 실천하는 삶」을 살겠다』고 거듭 다짐하며 『학생과 교사들의 땀의 결정체인 화선학교에 많은 관심을 가져달라』는 말도 잊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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