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 원시교회와 사도들의 활동
③ 재림의 약속
주님의 재림은 확실하다. 그 재림이 언제 올지는 아무도 모르지만 그분은 영광 중에 다시 오시어 산 이와 죽은 이드을 심판하실 것이다. 그리스도인은 이런 확실한 믿음을 가지고 새 하늘과 새 땅을 기다린다.
이런 확신과 기대는 그리스도교적 덕행을 실천하고 거짓 예언자들이 저지르는 방종을 피하도록 한다(2,1-19). 주님의 날은 도둑처럼 갑자기 올 것이므로 그 날을 기다리면서 티와 흠이 없이 살면서 하느님과 친숙한 관계를 맺으면서 살도록 노력해야 한다.
주님께서 오래 참으시는 것도 모든 사람에게 구원받을 기회를 주시기 위함이다(참조. 3,15). 사도 성 베드로는 주님의 영광스러운 모습을 직접 목격하였으므로(1,16-18 참조. 마르 9,2-8) 영광 중에 오실 그분의 재림을 자신있게 언급한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은 세속의 풍조나 사조를 따르지 말고 영광스럽게 오실 그분을 기다리면서 성실하게 살아야 할 것이다.
4) 사도 성요한
「예수의 사랑을 받던 제자」사도 성 요한은 사랑의 사도로 불려진다. 그는 제4복음서의 저자이며 세 편의 편지와 묵시록을 쓴 것으로 되어 있다. 20세기 들어 이 요한계 문헌들에 대한 비평적 견해들이 있어온 것은 사실이나 여기서는 요한계 성서에서 가르치는 영성적인 특징들 몇 가지만 언급하고자 한다.
(1) 복음
① 로고스(말씀)
복음 서문에는 말씀과 하느님과의 관계가 나온다. 로고스는 단적으로 말해서 삼위일체의 제2위이신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사도 요한은 그 당시 헬레니즘 세계에서 널리 퍼녀있던 철학적인 이 용어를 그리스도교에 접목시키려 한 것이 아니라 그 당시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던 다양한 의미를 나타낼 수 있었던 그 말이 하느님 아버지와 그리스도의 관례를 보다 적절하게 이해시킬 수 있다고 생각하였을 것이다. 그러므로 그 로고스는 필로의 로고스와는 아무런 연관이 없으며 스토아 학파의 로고스 개념과는 더더구나 연관이 없다.
문제는 그것이 우주론적 추론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 이스라엘 사람들이 그것을 늘 이해했던 것처럼 구원의 역사에서 나온 것이다. 요한 사도의 로고스는 창세기의 첫 부분에 대한 분명한 암시에 의해 처음부터 지적된 것처럼 예언자들의 구원적 말씀이다. 로고스의 영원성과 그 위격성 및 그분의 신성이 아버지 하느님과의 관계 안에서 서술되어 있다. 이 우주에 존재하는 모든 것은 말씀을 통하여 생겨났다.
그러므로 말씀은 하느님이시다. 그 말씀은 사람들을 위한 빛이다. 그 빛이 이 세상에 비치고 있다.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 말씀은 이 세상에 온 위대한 선구자 세례자 요한과 선민(選民)의 지도자 모세보다 더 위대하다. 그 말씀은 다름 아닌 그분을 추종하는 이들에게 선포된 구원의 기쁜 소식인 복음이다.
② 징표
복음에는 여러 징표가 나온다. 즉 예수님의 놀라운 업적을 통하여 사람드에게 믿음을 준 사건으로서 가나 혼인잔치, 고관의 아들 치유, 베짜타 못가의 병자 치유와 생명의 물, 오천 명을 먹이신 빵의 기적, 초막절 기간 중 성전에서 가르치심, 소경으로 태어난 사람의 치유와 세상의 빛, 라자로의 소생은 징표들로서 모두 주위 사람들에게 믿음을 주었다. 『제자들은 예수를 믿게 되었다』『이 말씀을 듣고 많은 사람들이 믿었다』등의 표현은 모두 징표를 통하여 믿음을 준 사건들을 말한다. 예수님은 공생활 중에 필요한 경우에는 기적을 통하여 당신의 신원과 사명을 드러내셨다. 인간은 약한 존재인지라 초인적인 행위나 사건 앞에 무력해지기 마련이다. 그분의 초인적인 행위는 도인들이나 기인들의 행위와는 달리 하느님 나라의 현존을 드러내는 것으로서 사람들을 하느님께로 인도한 표징이었다. 제자들을 비롯해서 여러 사람들이 그분의 행적과 가르침에 압도되어 그분을 믿고 추종하게 되었는데 바로 그 표징이 한 방법이었다.
③ 하느님의 유일한 아들
사도 성 요한은 복음서를 쓴 목적을 『다만 사람들이 예수는 그리스도이시며 하느님의 아들이심을 믿고, 또 그렇게 믿어서 그분의 이름으로 생명을 얻게 하려는 것이다』(20, 31)라고 하였다. 「하느님의 아들」에 대한 설명은 다름 아닌 그분의 신적 특징이다. 아버지 하느님과 온전히 같으신 분으로서 공관복음서에서 언급된 바로 그 「인자」이시다. 그분은 자신과 아버지의 독특한 지식(앎)으로서 자신의 아들 신분을 정의하셨다. 『일끼지 하느님을 본 사람은 없다. 그런데 아버지의 품안에 계신 외아들로서 하느님과 똑같으신 그분이 하느님을 알려주셨다』(요한 1,18). 그리고 그 유명한 사제의 기도에서 그분은 『의로우신 아버지, 세상은 아버지를 모르지만 나는 아버지를 알고 있습니다』라고 기도하셨다. 이 상호간의 얇은 상호 현존으로 바꾸어 말할 수 있다. 『아버지와 나는 하나이다』(10 ,30).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시고 내가 아버지 안에 있는 것과 같이…』(17, 21 14, 10 참조). 그분을 믿고 추종하는 자들은 모두 하느님의 「자녀들」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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