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의 쇄신을 위하여 요청되었던 시대적 징표로서 그리고 카리스마적 존재로서 선 프란치스코가 영성사 안에서 기여한 점들을 살펴본 후 그의 고유한 영성을 고찰하고자 한다.
영성사 안에서의 위치
1) 성 프란치스코는 같은 시대에 살던 성 도미니코가 그러했듯이 수도회의 발전 자체보다는 교회의 쇄신을 위해 요구되는 중대한 사명을 수행하기 위하여 수도회를 세웠다.
역사 기록에 의하면 성 도미니코가 성 프란치스코에게 이렇게 말한 적 있다.『프란치스코 형제여, 나는 당신의 수도회가 우리 수도회와 하나가 되어 교회 안에서 단 하나의 생활 방식을 지니기를 바랍니다』도미니코가 이런 말을 하게 된 데는 상당한 이유가 있다. 그들이 세운 두 수도회는 시대의 요청에 의하여 그 기원과 목적에 있어서 철저한 복음적 청빈의 실천과 설교 사도직 수행 등 유사한 점을 많이 지니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프란치스코는 근본적인 복음주의를 표방하면서 도미니코 보다 더 엄격한 청빈 생활을 추구하였다.
2) 성 프란치스코는 어느 누구보다 가난의 삶의 의미와 동기를 복음의 정신에 따라 영성적으로 정립한 분이다. 그는 가난을 가장 가까이 예수 그리스도의 발자취를 따르는 길로 확신하였다. 그에게 있어 가난은 가난하세 사신 그리스도에 대한 사랑에서 연유한다.
3) 성 프란치스코는 당시 심각할 정도로 세속화되어 있던 교회의 상황에서 가난을 통한 복음적 생활에로의 회귀, 신앙에 대한 성실성, 교회 권위에 대한 도전이 아닌 순종, 모든 계층의 회심을 촉구하는 사도직 운동을 전개하며 대중화하는 데 크게 기여한다. 교회 안에서 정통성과 이단, 탁발승과 빗나간 개혁자들 사이에 선을 긋고 식별하기 힘들던 그 당시, 프란치스코의 신앙적 열성과 교회에 대한 올바른 자세, 그리고 기꺼이 실천하던 복음적 청빈생활의 모습은 교회 쇄신을 위한 시대적 징표로 부각되었던 것이다.
4) 성 프란치스코의 수도회는 공동체가 커감에 따라 사도직에 봉헌된 수도회에서 가능한 청빈의 정도에 관해 논란하기 시작하여 그가 살아 있을 동안에도 청빈의 엄격성을 좀 완화시키지 않을 수 없었다. 그의 사후에 수도회는 「규율 엄수주의자」,「공동체 중심주의자」및「엄률 영성주의자」로 나뉘었다. 1257년에서 1274년까지 총장이던 보나벤투라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모든 수도자들이 프란치스코회 고유의 생활 양식에로 일치할 수 없었다.
긴 세월이 지난 후 1909년에 교황 비오 10세는 사도적 서신 「Saptimo jam pleno」에서 프란치스코 「제1회」의 세 분파는 「작은 형제회」,「콘벤뚜알 프란치스코회」및 「카푸치노회」로 영구히 설립됐고, 세 명의 총장은 모두 세 수도회가 동일한 나무의 가지들인 만큼 성 프란치스코의 후계자임을 선언했다.
5) 성 프란치스코의 영성의 특징 중 하나가 「형제애」이것은 인간들과는 물론이며 자연과 사물과의 관계에서 이루어지는 사랑이다. 그는 영혼이 없는 창조물과도 대화하며 화해를 이루고자 하였다. 그는 사물들 안에서 단순히 하느님의 흔적 뿐아니라 그분의 모상을 보면서 모든 사물을 사랑하시는 하느님의 실재를 느꼈다.
자연과 형제적 친교를 이루고자 하던 프란치스코의 시는 환경 보호자나 단순히 자연사랑에 빠진 시인이 읊은 자연에 대한 예찬의 차원에서가 아니고 우주에 깃들여 있는 신비로움과 거룩함에 대한 심오한 직관에서 우러나온 노래였다. 많은 것들이 하느님을 더욱 가까이 알고 만나게 해주며 그리스도를 상기시켜 주기 때문에 그것들을 사랑했던 것이다. 신앙에서 우러나올 수 있는 그러한 사랑의 차원에서 바라보는 그에게 모든 것은 형제자매와 같았다. 그는 그가 호칭하고자 하는 사물이 이태리 낱말의 성(姓)에 따라, 즉 남성이냐 여성이냐에 따라 형제 혹은 자메라고 하였다. 예를 들어 남성 단어인 해를 「형제」라 불렀고, 달과 별은 여성이므로 「자매」라 불렀다. 불과 바람을 형제로, 물과 죽음을 자매라고 불렀다.
그가 아름다운 「태양의 노래」를 지을 때는 이미 눈이 거의 멀어있던 상태였다고 한다. 하느님의 창조물의 진수를 꿰뚫어 볼 수 있는 눈은 육안(肉眼)을 초월하는 영안(靈眼)이 아니겠는가.
6) 프란치스코가 베르나 산에서 그리스도의 수난을 묵상하던 중 받게된 오상(五傷)의 은총은 그리스도교 영성사에서 한 개인이 그리스도의 수난의 성흔(聖痕)을 볼 수 있도록 뚜렷이 받은 최초의 경우이다. 그후 오늘에 이르기까지 많은 사람들이 그 은총을 받았지만, 프란치스코가 그 은총을 받은 첫 사람으로 알려졌다.
7) 성 프란치스코는 다른 영성가들과 달리 자신의 영성에 관한 저서를 남기지 않았다. 수도회칙과 몇 통의 편지, 유언장, 권고 등 일부의 글과 그가 말년에 하느님의 창조물의 아름다움을 노래한 「태양의 노래」가 있다.
프란치스코의 영성
성 프란치스코의 영성의 핵심적 특성은 그리스도 중심적이다. 즉 예수 그리스도의 가르침과 그분의 삶의 발자취를 따르는 것이다. 예수님의 탄생과 복음 선포 활동, 수난과 죽음, 부활 등 강생과 구원의 신비, 그리고 예수님의 인성(人性)이 그에게 매우 중요한 영성적 관심사였다.
그는 그리스도를 본받는 데 있어 근본적인 복음주의를 표방하면서 절대적 가난을 강조한다. 그리스도를 본받는 가난은 프란치스코의 영성의 근본 바탕이고 그것과 긴밀히 연관되는 자세이며 삶인 겸손, 단순성, 기쁨, 순명, 노동과 애긍, 형제애 등이 그의 영성적 주축을 이룬다.
가난 : 그리스도의 삶 본받기
「가난」이 무엇이냐는 질문에 프란치스코는 매우 간단히 대답한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가난입니다』
그에게 가난은 복음서 안에서 볼 수 있는 그리스도의 가난의 삶이며 동시에 가난한 사람들 안에 현존하시는 그리스도의 가난이다. 그에게 가난의 동기는 가난하신 그리스도께 대한 사랑이다. 그러므로 가난은 완성에 나아가기 위한 방법이기에 앞서 그리스도께 대한 사랑의 결과이다. 그가 생활한 가난이란 가난하신 그리스도께 대한 사랑의 충실성인 것이다.
그에 의하면 모든 창조물은 하느님의 절대적 주권에 속하는 것이며, 그분이 지상의 것을 사람들에게 위탁하셨다. 그러므로 인간이 하느님께 좋은 것을 돌려 드리지 않고 남용하거나 소유할 때 죄를 짓는 것이다. 죄란 하느님의 절대적 주권을 인정하지 않는 것이다. 인간의 소유 의식은 하느님과의 친교의 길을 막는 동시에 다른 이 그리고 인간공동체에 나눔의 길을 막는 것이다.
그의 회칙에서 『소유 없이』라고 표현한 내용은 물질적 재물에만 국한되지 않고 영적인 선까지 포함한 완전한 이탈을 의미한다. 외적 가난은 먼저 정신적 가난에 그 근거를 두는 것이며, 한편 외적인 재물에 대한 포기는 오직 복음적 가난이 요구하는 내적 마음 자세를 갖추기 위해 필수적인 것이다.
가난에 대한 프란치스코의 가르침에 따르면, 그의 형제들의 생활 양식에서 이루어지는 자연적 결과는 생계를 위하여 인간적 안전 대책이 없는 생활이다. 당시 종교적 관심이 줄어들고 세속화되어 가는 사회 안에서 프란치스코는 형제들과 함께 동냥을 하면서 그리스도와 그의 제자들의 삶의 방식을 따르는 사도적 삶을 증거해야 한다고 생각하였다. 그에 의하면, 가난은 개인으로나 공동체적으로 절대적이어야 하고, 무엇보다 가난을 공동으로 지키는 것이 중요했다.
※알림 = 프란치스코 성인의 연재순서가 지난호에 하(下)가 먼저 게재됐고 이번호에 중(中)이 게재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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