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이 온통 흰 눈으로 덮인 마을에 사람들이 복작거린다. 그림 속 사람들은 고만고만한 크기로 그려졌기 때문에 이들이 누구인지, 또 무엇을 하고 있는지 한눈에 알아보기가 쉽지 않다. 화면 오른쪽 얼음판 위에는 썰매 타는 아이들, 팽이 치는 아이들, 혹은 얼음판 위를 걸어가는 사람들이 보인다.
화면 왼쪽 한 건물 앞에서는 사람들이 북새통을 이루고 있다. 이들은 줄을 선 것 같기고 하고, 되는 대로 모여 있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확대된 그림(아래)을 보면 한 남자가 동전 같은 것을 받고 있고, 그 옆에 있는 남자는 장부에 무언가를 기록하고 있다. 아마도 돈을 내는 사람들의 이름을 기록하고 있는 듯하다. 그러고 보니 이 집의 담 위쪽에는 마치 간판처럼 둥근 바퀴 같은 것이 매달려 있다.
화면 앞 쪽에서는 한 남자가 돼지를 잡고 있고, 대형 솥과 땔감이 보인다. 닭 세 마리가 부리를 땅에 박고 모이를 쪼는가 하면, 두 대의 수레 위에 맥주 통으로 보이는 대형 드럼통이 실려 있다. 바로 이 수레 뒤에 한 남자가 나귀에 여인을 태우고 사람들이 모여있는 집을 향하고 있다. 여인은 푸른색 망토에 싸여 얼굴만 겨우 보일 뿐이다. 앞장 선 남자는 뒷 모습에다 모자까지 쓰고 있어서 얼굴을 볼 수가 없는데 자세히 보니 어깨에 대형 톱을 들고 있다. 때는 바야흐로 석양 무렵, 마른 나무 가지 사이로 붉은 해가 반쯤 넘어가고 있으니 사람들은 마음이 바빠져서 종종걸음으로 길을 재촉하고 있다.
어느 북유럽 마을의 겨울 풍경과 그 마을에서 일어나고 있는 사건을 그린 이 그림의 주제는 도대체 무엇인가?
독자께서도 눈치를 채셨겠지만 이 그림은 루카 복음의 한 장면으로 아우구스투스 황제 시절 세금을 걷기 위해 실시한 호구 조사에 응하기 위해 길을 떠난 요셉과 마리아를 그린 피터 브뤼겔의 ‘베들레헴의 호적등록’이다. 갈릴레아 지방의 나자렛 마을을 떠난 두 사람은 목적지인 베들레헴에 도착했다. 하지만 그들 말고도 수많은 인파가 호구조사에 응하기 위해 각지에서 모여들었다. 그다지 크지 않은 마을이다 보니 여관이라고 해봐야 고작 몇 개 있을 터인데 빈 방이 있을 리 없다. 하는 수 없이 이들은 호적 등록을 마치고 방을 구하지 못한 채 마구간 한편에서 피곤한 몸을 쉰다. 바로 그날 밤, 아기예수가 태어났다. 화가는 요셉이 목수라는 사실을 강조하려는 듯 대형 톱을 어깨에 메게 하였고, 다시 보니 푸른 망토 속 여인도 아랫 배가 볼록이 나와 있다.
이 그림은 분명 성경의 내용을 그린 성화이다. 하지만 그림 속 주인공들은 수많은 인파에 묻혀 있을 뿐 전혀 강조되지 않았다. 성화가 탄생한 이래 그림 속 주인공이 이처럼 엑스트라 속에 묻혀버린 것은 처음이다. 브뤼겔은 북유럽의 평범한 겨울 풍경을 통해 성경의 한 장면을 그려냈다. 일상으로 들어온 성경 이야기라고 해야 할 것이다.
브뤼겔의 이 발상은 완전히 파격적이다. 이 그림이 그려진지 불과 몇십년 지나지 않아 그가 활동한 오늘날의 네델란드와 벨기에 지역에 속하는 플란더즈 지방에서는 일상을 주제로 한 풍속화라는 장르가 탄생하여 인기를 누리게 된다. 역사에 남는 작가들은 뭔가 남다른 것을 이룩하였는데 브뤼겔은 성경과 일상을, 혹은 주인공과 엑스트라를 구분짓지 않는 방식으로 새로운 회화의 세계를 개척했다. 이 화가는 평범한 일상 역시 성경 속의 장면 이상으로 소중한 가치가 있다고 생각한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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