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도가 들끓고 있다. 지난 4년여 간 제주도를 반목과 분열의 늪으로 빠뜨리게 한 ‘해군기지’ 문제 때문이다. 부지선정과 타당성을 둘러싼 논란, 국방부 장관을 상대로 한 사업 무효 소송, 김태환 전 제주도지사 주민소환과 주민투표 등 그동안 제주도민들은 심각한 불화와 갈등을 겪어왔다.
찬반 의견이 첨예하게 맞선 가운데 15일 제주지법은 찬성 측인 제주특별자치도의 손을 들어줬다. 제주지법은 이날 해군기지 후보지 강정마을회가 제주특별자치도를 상대로 낸 ‘절대보전지역변경처분 무효확인 소송’을 ‘원고자격이 없다’는 이유로 각하했다. 이에 대해 강정마을회 강동균 회장은 “공권력의 횡포”라고 강력 반발하며 항소의 뜻을 밝혔고, 시민단체 또한 일제히 성명과 논평을 통해 재판부를 비난했다. 법원 판결이 내려졌지만 오히려 갈등의 골이 깊어진 모양새다.
17일 천주교 제주교구평화의섬특별위원회를 비롯한 제주군사기지범대위도 기자회견을 통해 “왜곡된 군사안보 논리와 거대한 공권력을 앞세운 군사기지의 건설 시도 앞에서 제주의 미래를 걱정하는 수많은 목소리도, 주민들의 눈물겨운 투쟁도, 사법정의에 기댄 절박한 호소도 그 어떤 것도 소용이 없었다”며 “오늘부터 우리는 강정마을 이곳에서 군사기지 건설을 저지하기 위한 비상한 행동을 시작한다”고 밝혔다. 치열했던 4년여 간의 공방, 그리고 현재까지도 찬반 측이 첨예하게 대립하고 있는 제주 해군기지 문제. 우리 신앙인들은 이 문제를 어떻게 바라봐야 할까.
해군기지와 교회 가르침
살다 보면 때론 이념, 가치관, 이해관계가 얽히고설켜 식별하기 어려운 문제가 발생하곤 한다. 제주 해군기지 문제 또한 그러한 문제 중 하나다. 안보, 평화, 생명, 경제 등의 논리가 첨예하게 대립하고 있어 식별하기 쉽지 않아 보인다. 하지만 복잡해 보이는 해군기지 문제도 교회의 가르침을 잘 되새긴다면 오히려 쉽게 접근할 수 있다. 교회의 가르침은 신앙인들이 혼란스럽게 여기는 사회문제에 대해 올바로 식별하고 행동할 수 있도록 돕는다. 복음을 근거로 한 이 가르침에 충실할 때 진리의 빛을 밝힐 수 있고 진실에 한 발 더 접근할 수 있기 때문이다.
보편교회는 제주 해군기지에 대해 직접 가르치고 있지는 않다. 하지만 그동안의 가르침을 바탕으로 이 문제에 접근해본다면 방향성과 결론을 유추할 수 있다.
“상당히 많은 국가들이 보호책으로 삼는 군비 경쟁은 평화를 확고히 유지하는 안전한 길이 아니며 … 군비 경쟁으로 전쟁의 원인들이 제거되기는커녕 오히려 점차 증대될 수밖에 없다. 군비 경쟁은 인류의 극심한 역병이며 가난한 사람들에게 견딜 수 없는 상처를 입히는 것이다”(사목헌장 81).
“엄청난 재원의 낭비는 가난한 사람들의 구제를 막고, 민족들의 발전을 방해한다. 과잉 군비는 분쟁의 원인을 증가시키고 분쟁이 확산될 위험을 증대시킨다”(가톨릭교회 교리서 2315).
이러한 교회의 가르침을 근거로 문제를 살펴보면, 제주 해군기지는 큰 문제를 떠안고 있다. 안보 논리에 따른 제주 해군기지 군비 증강은 분쟁의 원인을 증가시키고 확산시킬 위험이 크기 때문이다. 제주 해군기지는 한국형 이지스함 등을 주축으로 한 20여 척 규모의 제7기동전단의 모항 역할을 하게 된다. 제주 해군기지에 퍼붓는 비용만 1조 원 가까이 든다.
중국-미국 갈등·충돌 우려
전문가들은 해군기지에 배치될 한국형 이지스함은 미군의 미사일 방어와 연동됐다는 점을 시사한다고 입을 모으고 있다.
미국 언론인 매슈 라이스는 최근 한 언론의 기고문을 통해 “제주 해군기지에 정박할 이지스 레이더 함대 등은 미국이 구상해온 이른바 미사일 방어 체계의 일부분”이라며 “현재 전 세계에 깔려 있는 미사일 방어 네트워크는 미국 주요 도시를 겨냥하는 중국과 러시아의 미사일을 겨누고 있다”고 언급한 것도 이러한 맥락이다. 제주도에 미군 미사일 방어 체계와 연동된 이지스함을 정박시키는 것 자체가 중국 측에서 보기에 노골적인 자극이다. 또한 제주 해군기지가 미 태평양 함대 이지스함의 주요 기항으로 사용된다면 이는 미국이 언제든 중국을 공습할 수 있다는 위협으로 보기에 충분하다. 현재 미군은 한-미 상호방위조약에 따라 우리 영토 어디든지 기지로 사용할 수 있기 때문에 미 태평양 함대 해상교통로의 길목에 위치한 제주 기지가 유사시에 미 함대의 기항지 구실을 할 것으로 전문가들은 예상하고 있다.
중국과 미국의 갈등이 최고조에 이르러 심각한 위협을 받는다면, 중국은 자국의 안위를 위해 제주 해군기지를 제일 먼저 타격할 것이다. 현실적으로 충분히 가능한 시나리오다. 이렇게 되면 미국과 중국의 신경전과 무력 충돌에 제3자인 제주도만 피해를 입게 될 수 있다. 평화를 외치며 군비 증강과 제주 해군기지를 들이지만 정작 제주도는 열강들의 긴장을 높이는 결과를 야기할 뿐이다.
■ 피해자로 남은 강정마을 주민
“상식 어긋난 중대한 범법행위”
국책사업이라는 이유로 절대보전지역에서 제외
주민의견수렴절차도 무시
제주 해군기지는 4·3 사건의 피해자인 제주도민들에게 또 한 번의 상처를 주고 있다. 해군기지가 들어선다면 제주도민들은 4·3 사건에 이어 또다시 이념 갈등에 의해 피해자가 되고 만다. 제주도는 지금도 4·3 사건의 상처를 떠안고 살아가고 있는 주민들이 많다. 당시 외부에서 유입된 이념과 공권력에 의해 많은 주민들은 아무 이유 없이 학살당해야 했다. 학살된 제주도민만 3만여 명에 이르렀다. 이들의 대부분은 좌·우가 무엇인지 모르는 순박했던 농민들이었다.
제주교구장 강우일 주교는 지난 2007년 ‘평화의 섬 제주를 염원하며’란 제목의 서한에서 “4·3 사건은 한반도 역사상 이만큼 부조리하고 억울한 죽음이 연출된 적이 없었다”며 “제주의 땅은 그들이 흘린 피를 헛되이 하지 말고 이를 거름으로 참된 평화의 섬이 되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제주 해군기지의 추진 과정 또한 상당한 결함을 갖고 있다. 평화를 지키려하는 일이 오히려 긴장만 야기시킬 수 있는 제주 해군기지는 추진과정에서 상당한 법적 결함을 드러내고 있는 것이다. 우선 보전지역관리조례를 정면으로 위반하고 있다. 해군기지 후보지인 강정마을은 생태계 경관 1등급 지역으로 조례에 따르면 절대보존지역을 해제할 수 없으나 국책사업이라는 이유로 절대보전지역변경처분이 이뤄졌다.
또한 절대보전지역을 변경할 때는 주민의견청취절차를 거쳐야 하나 제주도는 이를 무시하고 생략해 버렸다.
천주교 제주교구평화의섬특별위원회 부위원장 고병수 신부는 “절대보전지역과 같은 중대한 일을 경미한 사항으로 취급해 주민의견수렴절차를 무시하고 생략해 버리는 것은 상식에도 어긋날 뿐 아니라 가장 중대한 범법행위”라고 말했다.
또한 변경처분에 대한 도의회의 동의 절차에도 오류가 있다. 특별법에 의하면 절대보전지역을 지정하거나 변경할 때에는 도의회의 동의가 있어야 하는데 지난해 도의회는 절대보전지역변경처분에 대해 날치기로 동의 의결을 한 바 있다.
이에 대해 고병수 신부는 “제주도는 지난 1937년 일본의 전쟁용 군사비행장 설치 이후 매 15년 간격으로 끊임없는 군사기지 도전에 직면해 왔다”며 “이는 제주가 그만큼 어떤 침략세력이나 군사주의 세력도 탐낼 수밖에 없는 군사적 요충지임을 일러주고 있다”고 말했다. 이어 고 신부는 “군사기지 없는 평화의 섬, 생명의 섬을 후손들에게 물려주는 것이야말로 지금 시대를 살아가고 있는 제주인으로서 안고가야 할 숙명적 과제”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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