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원하신 하느님의 의지는 한없이 완전하게 사랑하는 능력이다. 그러기에 하느님의 마음은 무한한 사랑의 열정으로 충만하고 따라서 하느님은 깊이와 높이와 넓이를 헤아릴 길 없는 무한한 사랑의 바다이시다. 그러므로 한없이 선하신 하느님 성부, 성자, 성령 삼위 상호간에는 자신을 상대 위격에게 완전히 내어주는 무한한 사랑이 오고 가고, 삼위 상호간에 오고 가는 이 무한한 사랑의 심연 속에서 하느님은 완전하고 영원한 지복을 누리신다. 그리고 사람에게 유일하고 참된 행복은 무한한 사랑이신 하느님과 결합함으로써 하느님의 영원한 지복을 누리게 되는 데 있다.
무한한 사랑이신 하느님과 결합하기 위해서는 사람도 완전한 사랑이 되어야 한다. 사람의 의지는 무한한 사랑이신 하느님의 의지와 결합함으로써 완전한 사랑에 이르게 된다. 사람이 자기의 욕망을 버리고 하느님의 뜻에 더 완전히 순종할수록 사람의 의지는 하느님의 의지와 더 완전히 결합하게 된다. 그러면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사랑을 인간의 의지에 부어 주심으로써 사람이 더 완전한 사랑의 능력을 지나게 하신다. 사랑의 능력이 커질수록 사람의 의지는 더 강해져서 자기의 욕망과 감정을 더 완전히 지배하고 다스리게 되낟. 그래서 마침내 사랑의 열정이 너무도 커서 사랑의 배척하는 일체의 욕망과 감정이 사람의 마음에 발붙일 수 없게 되면 사람의 마음엔 언제나 사랑의 열정만이 있게 된다. 그러므로써 사람은 무한한 사랑이신 하느님과 영원히 결합할 수 있는 완전한 사랑이 된다.
그러나 인간의 의지가 하느님의 뜻을 버리고 교만과 탐욕과 육욕이라는 삼중의 욕망을 따르면 타락하게 되낟. 타락한 사람의 의지는 사랑의 능력을 상실하고 약해져서 욕망의 노예가 되고 만다. 그러면 사람은 배타적으로 자기만족만을 추구하는 이기주의자가 된다.교만은 사람이 자기자신을 우상으로 섬기게 만든다. 그래서 언제나 자기가 각광을 받고 두각을 나타내고 중요한 인물이 되기를 바라며, 자기가 더 많이 알려지고 칭찬받고 존경받기를 바란다. 교만한 사람은 모든 일을 하느님의 이름을 빛내기 위해서 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의 이름을 빛내기 위해서 한다. 한편 탐욕에 빠진 사람은 마음이 인색해져서 받기만을 좋아하고 베풀 줄 모른다. 그리고 재물이 그의 우상이기 때문에 원하는 재물을 얻기위해서라면 악을 행하는 것도 서슴치 않는다. 이런 사람은 성덕이라는 영원하고 참된 재산을 불리는 데는 전혀 무관심하고 오직 일순간만 자기에게 만족을 줄 뿐인 보잘것 없는 재물을 불리는 데만 전념한다.
또한 육욕에 사로잡힌 사람은 육체의 감각적 쾌락에만 탐닉함으로써 자신을 짐승 이하의 수준으로 타락시킨다. 육욕은 요구를 들어주면 줄수록 더 강해지고 그래서 더 자극적인 쾌락을 요구하게 된다. 육욕은 그 강렬하고 자극적인 쾌락 때문에 언제나 사람을 가장 쉽게 악으로 끌어들이늰 유혹의 수단이 된다. 절제되지 않은 육욕만큼 사람의 영혼에 위험하고 해로운 것도 없다. 그래서 예수님은 이렇게 사람들을 경계하셨다. 『손이나 발이 죄를 짓게 하거든 그 것을 찍어 던져 버려라 두 손과 두 발을 가지고 영원한 불 속에 던져지는 것보다는 차라리 불구의 몸이 되더라도 영원한 생명에 들어가는 편이 더 낫다』(마태오 18,8)
사람이 완전한 사랑에 이르려면 욕심을 완전히 버려야 한다. 그리고 반감을 갖지않고 겪는 고통만큼 사람을 욕심에서 더 완전히 이탈시키는 것은 없다. 십자가의 길은 완전한 사랑에 이르는 유일한 길이다. 그래서 속죄와 성화를 위해 사람에게는 자발적인 고행이 필요하고 그 전형적인 수단이 단식이다. 오늘 복음에서 일주일에 두 번씩 단식을 실천했던 바리사이파 사람들이 예수님께 제자들이 왜 단식을 하지 않느냐고 질문한다. 예수님께서는 지금은 제자들이 단식을 할 때가 아니지만 당신의 수난 이후부터는 제자들도 단식을 하게 될 것이라고 말씀하신다. 이 말씀대로 제자들은 주님의 수난을 기억하면서 고행과 단식을 실행했다. 제자들의 단식은 그들을 더 거룩하게 했지만 바리사이파 사람들의 단식은 그들을 거룩하게 하지 못했다. 그 이유는 제자들은 사랑을 가지고 단식을 했고 바리사이파 사람들은 사랑이 없이 단식을 했기 때문이다.
사랑으로 하는 고행은 사람의 마음을 겸손하고 가난하고 순결하게 만들지만 사랑이 없이하는 고행은 오히려 교만을 더 키우게 된다. 고행은 속죄와 성화를 위해 필요하지만 고행의 가치는 고행자체의 크기가 아니라 고행을 하는 사랑의 크기로 결정된다.성덕은 사랑의 크기로 측정되지 고행의 크기로 측정되는 것이 아니다. 사람이 하는 모든 일에 가치를 주는 것은 사랑이다. 기도도 선행도 고행도 하느님께 받은 특은조차도 사랑이 없으면 무가치하다.
『내가 하느님의 말씀을 받아 전할 수 있다하더라도…. 산을 옮길만한 완전한 믿음을 가졌다 하더라도, 사랑이 없으면 나는 아무 것도 아닙니다. 내가 비록 모든 재산을 남에게 나누어 준다 하더라도, 또 내가 남을 위해 불속에 뛰어 든다 하더라도, 사랑이 없으면 모두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Ⅰ 고린토 13,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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