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본문에서 모세와 아롬은 전혀 상반된 지도자 상(像)을 보여준다. 우선 아론은 잘못된 길을 가는 백성들을 저지하기는 커녕 기꺼이 그들의 공범자가 되었다가 질책을 당하게 되자 무죄를 주장하면서 백성이 「악에 젖어 있다」고 비난한다. 반면 모세는 백성의 잘못을 단호히 바로 잡고, 자신은 책임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목숨을 버려서라도 그들을 구하고자 한다. 하지만 예나 지금이나 참 지도자를 알아보기는 쉽지 않은가 보다. 백성은 자신들을 바르게 이끌어온 모세가 잠시 보이지 않게 되자, 순식간에 모세를 배신하고 아론에게로 향한다.
중국 현대문학의 아버지라고 불리는 노신은 위대한 인물이 제대로 평가받지 못하는 현실을 전사와 파리떼의 비유로 갈파한다.
『사람의 위대함을 평가함에 있어서 정신의 방대함과 육체의 방대함을 재는 법칙은 정반대이다. 정신의 방대함은 거리가 멀수록 커 보이고, 육체의 방대함은 멀수록 작아 보인다. 위대한 정신의 소유자는 멀리 있을 때는 쉽게 존경할 수 있지만, 가까이 있으면 그의 위대함보다는 결점과 상처가 더 눈에 뜨이다. 전사(戰士)도 그러하다. 전사가 죽었을 때 파리들은 맨 먼저 그의 결점과 상처를 발견한다. 파리들은 전사의 상처를 빨고 웽웽거리며, 자신들이 죽은 전사보다 영웅인 체 득의만만하다. 그러나 전사는 이미 죽었기에 파리를 쫓지 못한다. 파리는 더욱 웽웽거리고, 그 웽웽거림을 영원불멸의 소리라고 생각한다. 파리에게는 결점과 상처가 없지만 전사는 결점과 상처가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결점과 상처가 있더라고 전사는 전사이며, 아무리 완전하더라도 파리는 어디까지나 파리다. 가거라, 파리 떼들아! 아무리 날개가 있어도, 아무리 웽웽거려도 너희들은 결코 전사를 초월할 수 없나니, 가거라, 이 벌레들아!』
그 앞에 서면 두렵고 떨리는 존재이면서도 사람을 한없이 매료시키는 하느님. 시나이산에서 그분과 감히 계약을 맺고 동반자가 된 이스라엘의 지도자 모세는 하느님의 법이 새겨진 두 개의 돌판을 가지고 곧 하산하라는 명령을 받는다. 산 아래에서 기다리던 이스라엘 백성들이 아론을 충동질하여 금송아지 상을 만들고는 『이것이 우리를 이집트에서 인도해 낸 우리의 신이다』라며 경배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스라엘 백성은 그렇게도 빨리 그분과의 계약을 파기해버린 것이다(32, 8참조). 그들은 보고 만지고 소유할 수 있는 하느님을 원했기에, 보이지도 않고 파악하여 알아낼 수도 없고 또 소유할 수도 없는 하느님을 받아들이기가 어려웠던 것이다. 이 금송아지 사건은 그 자체로 신적인 존재가 아닌데, 그것을 섬기는 자가 거기에 절대적 가치를 부여하고 숭배함으로써 마침내 그것의 노예가 되고 마는 우상화의 전형을 보여준다. 금송아지는 원래 하느님이 서 계시는 발판으로 여기저던 것이다. 따라서 금송아지 자체가 우상은 아니었으나, 백성들이 그것을 심으로 여기고 경배함으로써 결국 우상이 되는 것이다.
▲ 아론과 백성들이 공모한 금송아지 사건은 명백한 계약 파기요, 범죄행위였다.
시나이산을 내려와 백성들이 금송아지상을 둘러싸고 노래하며 춤추는 장면을 목격한 모세는 격분하여 하느님이 주신 돌판을 내던져 깨뜨리고 우상숭배자들을 제거한 후 자신의 생명을 내놓고 백성들에 대한 용서를 간구한다. 하느님께서는 모세의 기도, 레위인들의 행동, 백성의 참회를 보시고 그들을 용서하시어 깨어진 계약을 다시 맺으신다. 이처럼 백성의 죄를 용서받기 위해 자기 목숨을 내놓는 참된 중재자의 모습은 모세를 비롯하여 아브라함(창세 18장), 아모스(7장), 예레미야(14장), 사도 바오로(로마 9장)에게서 찾아볼 수 있으며 예수님에게서 완성된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무릇 백성의 지도자는 세상과 인간을 위하시는 하느님께 충실한 사람이 되어야 할 터이다. 그러나 이 시대에는 하느님을 잊어버리고 양심은 죽어버린 채 사람들의 인기에만 영합하는 지도자들이 얼마나 많은가. 진정 세상과 인간을 하느님께로 인도하여 그 존재 목적에 충만하게 할 그런 지도자를 식별할 줄 아는 바른 안목이 필요한 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