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교는 인간적 열정이나 스스로의 힘으로 이룰 수 있는 것이 아니며 하느님의 특별한 은총으로 가능한 것이다. 토마스 모어가 최고의 사랑의 증거자가 될 수 있었던 것도 하느님의 특별한 은총 때문이었다. 그러나 그가 그러한 은총을 받을 수 있었던 것은 순교적 결단 중에 일상의 성실한 삶을 살면서 성령께 자신을 개방하였기 때문이다. 그의 영성을 계속 살펴보기로 한다.
3) 주님 위해 목숨바친 순교자
모어는 하느님과 세상의 불의의 권력 앞에서 결단을 내려야 하는 중대한기로에서 하느님의 뜻에 모든 것을 위착한다. 그는 결국 국정에서 지위와 영예 그리고 부수적인 모든 혜택을 포기해야 했다. 대법관이며 수상이던 그가 런던 탑의 감옥에 갇혔고 그를 심문하고 심판하는 자들앞에 서야했다. 그는 모든 수입을 잃고 부동산을 몰수당하며 그로 인해 어려움을 겪어야 하는 가족들에 대한 우려로 더욱 고통스러웠다. 그는 왕의 우정어린 호소와 배려 그리고 친구들이 감언이설에도 굴복하지 않고 끝내 목숨 바쳐 진리와 정의 편에 섰다. 우리는 모어의 언행에서 순교자들이 지녔던 기본적이고 핵심적인 자세를 발견할 수 있다.
모어는 무엇보다 먼저 순교자의 원형이신 그리스도의 모범을 따르고자 하였다. 교회의 전통적 신학에 의하면 순교는 그리스도의 죽음과 그 죽음의 의미에 기초를 두며 순교의 특성 중 첫째 측면이 스승이시며 주님이신 그리스도를 본받음이며 따름이다. 모어는 이 진리를 몰랐을 리 없다. 그는 감옥에서 자녀들에게 이렇게 썼다.
『아무도 머리가 없이는 그렇게 놓은 영광에 다다를 수 없다. 우리의 머리는 그리스도이시다. 따라서 우리는 그분과 한 몸으로 일치되어 있어야 하며 우리도 저 영광에 이르려면 그분의 지체로서 그분을 따라야 한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그리로 이끄시는 영도자이시다. 너희는 그리스도께서 수난 하심으로써 그분의 나라에 들어가셨음을 모르느냐? 그분이 몸소 고통 없이 그분의 나라에 들어가지 않으셨다면 누가 감히 아무 고생 없이 그리스도의 왕국에 들어 갈 수 있겠느냐?』
순교자들은 단 하나 뿐인 소중한 목숨까지 바치면서 주님을 증거할 수 있다는 것이 자신들의 힘이나 인간적 열의 또는 영웅심으로 가능한 것이 아님을 깨달았다. 오히려 질그릇 같이 깨지지 쉬운 자신들의 연약함(2고린 4,7 참조)을 작가하고 인정하면서 그들 안에 성령의 은총이 충만할 때 순교가 가능한 것임을 고백하였다. 그러므로 그들은 열렬한 애덕을 실천하면서 모든 성인의 통공 안에서 일치하는 공동체의 형제 자매들에게 기도의 도움을 청하였고 또한 성령의 특별한 힘을 끊임없이 간구했던 것이다. 토마스 모어도 자신의 연약함을 알았고 그러면서도 하느님의 은총을 신뢰하였다. 그는 딸 마가렛에게 이렇게 썼다.
『네가 너희 아버지 보다 약하고 여린 마음을 가졌을 리 없다. 비록 내 천성이 아픔을 퍽이나 싫어하고 고삐같은 것만 보아도 소름이 끼치지만, 사랑하는 아가, 바로 여기에 내 강점도 있나보다. 즉 내가 평생 겪어본 모든 사경(死境)의 두려움의 한 가운데서도 하느님의 자비와 힘으로 단 한번도 양심을 어기는 일에 동의할 생각조차 안 했으니 말이다』
두려움 속에 그는 하느님께 고통을 인내와 기쁨 마음으로 견디어 낼 힘을 빌었다. 그는 친구 본비지에게 보낸 글에서 이렇게 말한다. 『자 그러면 친애하는 본비지, 전능하신 하느님께서 자네와 나 그리고 이 세상에 사는 모든 필멸의 인간들에게 저 기쁨을 위해서는 이 세상의 모든 보화와 영화와 삶의 희열까지도 무로 여기는 힘을 내려 주시길 기도하네』그리고 그는 자주 이렇게 말하였다.
『아무런 거리낌없이 죽음을 대할 수 있는 모범적 생활을 해왔다고는 생각하지는 않는다. …하느님께서 내가 죽기를 원하신다면 나의 마지막 시간에 은총과 자비를 내게 거절하지 않으실 하느님의 자비를 청하겠다』
순교가 그리스도의 모방이라 할 수 있는 것은 순교자의 수난과 유사한 점을 가진다는 사실 때문이 아니며 무엇보다 순교자의 희생제사가 그리스도의 자세와 비슷하기 때문이다. 즉 사랑 때문이다. 모어는 자신이 곤경에 처하고 단두대에서 비참하게 죽게 되었지만 어느 누구도 원망하지 않았으며 심지어 왕을 위해서까지 기도하였다. 그는 참수형을 구경하러 몰려온 군중을 향해 마지막 말을 외쳤다. 그것은 성령과 함께 하는 권위있는 순교자로서의 신앙고백이었다.
『여러분, 나를 위하여 기도해 주십시오. 나도 하느님 나라에서 여러분을 위해 기도할 것입니다. 여러분의 왕을 위해 기도하십시오. 그분이 하느님의 마음에 드는 왕이 되도록 말입니다. 나는 왕의 충실한 신하로 죽습니다. 그러나 나는 왕의 신하이기 전에 하느님의 신하로 죽습니다.
4) 신앙에서 성인의 삶
하느님과 그분의 진리를 위해 목숨 바치는 행위를 뜻하던 「순교」의 개념은 박해 없던 시대의 교회 안에서 「영적 순교」라는 뜻으로 기도와 고행에 전념하던 은수생활에 그리고 나중엔 수도생활에까지 적용되었다. 순교에 대한 폭넓은 이해는 그리스도인의 일상적 생활에까지 확대 적용되었다. 매일 앞에 놓이는 각자의 십자가를 지는 것이 순교의 시작이며 핵심이라는 것이다. 실로 그리스도인으로서 사는 복음적 삶엔 매일 매 순간 순교적 결단이 요구된다. 가정에서 훌륭한 부모의 역할 수행, 좋은 자녀로서의 삶, 일터에서 모범적 근무와 기쁜 봉사, 정의로운 선택, 성실한 신자로서의 본분이행, 이웃관계에서 절제, 양보, 이해, 용서, 화해 등 여기에 언제나 순교적 결단이 요구된다. 일상에서 이렇게 길들여진 삶이 진정한 의미의 순교를 요구하는 극한 상황에 처하게 될 때 주님을 위해 목숨까지 내 놓을 수 있는 은총에 이르게 하는 확고한 기반이며 보증이라는 것을 순교자들의 생애에서 찾아 볼 수 있다.
토마스 모어는 훌륭한 성인이었다. 그것은 그가 어느 날 목숨을 내놓아 주님과 그분의 교회를 위하여 죽었기 때문만은 아니다. 더구나 교회로부터 시성되었기 때문만도 아니다. 그가 성인이었던 것은 일상에서 언제나 하느님을 향해 살았으며 하느님을 위해 모든 것을 바칠 용의로 근본적 결단을 내리며 살았기 때문이다. 모어는 감옥에서 헨리 8세를 영국교회의 최고 지도자로 승인 서명하기를 거부하면서 이렇게 말했다.
『내 양심은 나에게 국왕의 후계자들에게 충성을 맹세하도록 합니다. 그러나 국왕의 대주교권을 승인하는 서명은 내 영혼이 영원한 저주를 받는다 해도 할 수 없습니다』
어느 날 왕은 모어의 마음을 돌리려는 시도로 모어의 딸 마가렛으로 하려금 감옥을 방문하도록 주선했다. 모어는 얼마 전에 받은 딸의 편지 내용을 잘 기억하고 있었다. 딸은 그에게 하느님은 사람의 혀보다 마음을 더 소중히 여기실 터이니 그가 처신을 바꾸어도 그의 속마음을 하느님은 잘 알고 계실 것이라고 썼던 것이다. 그래서 모어는 방문한 딸에게 이렇게 말했다.
『사랑하는 나의 딸 마가렛, 내 생애에서 나를 가장 괴롭혔던 것은 너의 편지였단다. 나는 나의 영혼의 구원을 위하여 해선 안 될 일이 무엇인지 알고 있단다. 너에게 간청한다. 다시는 그런 무리한 요구를 하지 말기 바란다』
그는 세상의 어느 것도 하느님의 사랑에서 떼어놓을 수 없기에(로마 9,39 참조) 매일 자기의 십자가를 지고(루가 9,23 참조) 주님의 뜻을 따랐던 것이다. 극도의 시련인 단두대의 죽음은 그의 그러한 삶을 세상에 밝혔을 따름이다. 그가 순교로 끝까지 아니하고 수상으로서의 영화를 누리고 가족 및 친지들과 행복한 생활을 하며 장수했다고 하더라도 그의 삶의 자세는 다를 바 없었을 것이다. 그의 매일의 봉헌적 삶이 그를 순교의 은총에까지 이르게 했던 것이다.
모어는 실로 다음과 같은 바오로 사도의 말씀을 그의 삶으로 증거했던 것이다. 『모든 것이 다 여러분의 것입니다. …이 세상도 생명도 죽음도 현재도 미래도 다 여러분의 것입니다. 그리고 여러분은 그리스도의 것이고 그리스도는 하느님의 것입니다』(1고린 3,21~23).
가장 많이 본 기사
기획연재물
- 길 위의 목자 양업, 다시 부치는 편지최양업 신부가 생전에 쓴 각종 서한을 중심으로 그가 길 위에서 만난 사람들과 사목 현장에서 겪은 사건들과 관련 성지를 돌아본다.
- 다시 돌아가도 이 길을한국교회 원로 주교들이 풀어가는 삶과 신앙 이야기
- 김도현 신부의 과학으로 하느님 알기양자물리학, 빅뱅 우주론, 네트워크 과학 등 현대 과학의 핵심 내용을 적용해 신앙을 이야기.
- 정희완 신부의 신학서원어렵게만 느껴지는 신학을 가톨릭문화와 신학연구소 소장 정희완 신부가 쉽게 풀이
- 우리 곁의 교회 박물관 산책서울대교구 성미술 담당 정웅모 에밀리오 신부가 전국 각 교구의 박물관을 직접 찾아가 깊이 잇는 글과 다양한 사진으로 전하는 이야기
- 전례와 상식으로 풀어보는 교회음악성 베네딕도 수도회 왜관수도원의 교회음악 전문가 이장규 아타나시오 신부와 교회음악의 세계로 들어가 봅니다.
- 홍성남 신부의 톡 쏘는 영성명쾌하고 논리적인 글을 통해 올바른 신앙생활에 도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