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대교구 한국순교자현양위원회는 신유박해 200주년을 앞두고 지난해에 이어 두 번째로 매월 한 차례 서울 절두산 순교성지에서 특강 및 순교자 현양미사를 마련한다. 3월 8일부터 12월 6일까지 모두 10차례에 걸쳐 마련되는 특강을 요약 소개한다.
마테오 리치(Matteo Ricci)를 비롯한 예수회 선교사들에 의해 시도된 적응주의적 선교 방법은 중국 선교에 대한 물꼬를 트는 계기를 만들게 된다. 마테오 리치 이후의 예수회 선교사들은 리치의 선교 방법을 이어받아 천주교를 전교하는 한편, 서양 문명을 전수하기 위하여 명청(明淸) 180여년간 약 350여종의 한문서학서(漢文西學書)를 저술하였다.
예수회 선교사들은 보유론적인 관점에서 한문 서학서를 저술하였다.
그들은 보유론적인 관점에서 그리스도교를 설명하기 위해 이(理)와 기(氣)의 묘합(妙合)에 의거하여 만물의 조성(造成)을 설명하는 주자학이나 성리학을 부정하는 대신, 선진 유학의 소사상제(昭事上帝), 조상 숭배, 상선벌악(賞善罰惡)과 공자의 인(仁) 사상을 긍정적으로 수용하였다.
이처럼 그들은 한편으로는 주자학(성리학)의 현세 중심적인 인생관에 대해 비판하며 선진 유학이 품고 있는 유교 사상이나 유학이 지니는 학문 가치와 사회적 의의를 인정하였다.
조선 정부는 1637년부터 사대사신을 청에 파송하게 된다. 약 200명 전후로 편성된 사대사행원(事大使行員)들 가운데 유식 인사들이 북경의 네 천주당을 방문하여 서양인 성직자와 한문으로 필담을 통하여 그들과 토론을 갖기도 하였다.
이러한 과정을 거쳐 한문서학서가 우리나라에 처음으로 도입된 기록은 선조 대희 학자인 이수광의 저서 「지봉유설(芝峰類說)」에 나온다. 이후 이익을 거쳐, 안정복, 신후담에 이르기까지 150년간, 한문 서학서와 접촉을 가진 석학들이 열독한 한문 서학서는 많았다. 이들의 뒤를 이어 이벽, 이승훈, 권일신, 정약종, 정약용, 이가환 등이 마침내 천주교의 세계로 이끌려 들어갔던 것이다.
18세기 후반 서학에 대한 관심은 천주교 신앙의 영역까지 확대되었으며, 1770년 말-1780년 초에 신앙 운동이 태동되었다. 그 결과 이승훈을 중심으로 한 공동체가 서울에서 태동했다.
한문 서학서를 체계적으로 연구하여 보유론적인 입장에서 천주교 교리를 이해한 학자는 이익(李瀷, 1681-1796)이었다. 젊은 학자들 중에서 보유론을 이해하고 천주교 신앙을 받아 들이려는 움직임이 나타나게 되었다.
권철신의 제자로 훗날 한국 천주교회를 창설하는 데 주도적인 역할을 한 이벽(李檗, 1754-1786)은 유교와 천주교의 교리를 조화시키면서 천주교를 신앙으로 수용하였다. 이후 보유론적인 그리스도교 교리는 조선 천주교회 초창기 신자들에게도 자연스럽게 받아들여지게 되었다. 정약종(丁若鍾, 1760-1801), 정약종의 아들 정하상(丁夏祥, 1795-1839)등이 그들이다.
이렇게 보유론에 바탕을 둔 한문 서학서를 통해 그리스도교는 자연스럽게 그 뿌리를 내릴 수는 있었다. 1970년의 조상 제사 금지령과 1791년의 진산사건(珍山事件)을 통해 조선 천주교회는 일대 혼란을 겪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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