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천주교회 주교들도 적게는 수만, 많게는 수백만 명의 교구민들을 돌보는 목자로서 분주한 일정을 보내고 있다. 교구민들 또한 각 교구장 주교에 대한 관심과 사랑이 크지만, 폭넓게 소통할 기회가 적은 것이 현실이다.
새해를 맞아 전국 각 교구장들의 활동 모습을 일면 들여다보는 ‘우리 주교님은요’를 연재한다. 첫 회에서는 현재 한국 주교회의 의장직을 맡고 있는 제주교구장 강우일 주교를 만나봤다.
강우일 주교는 1974년 사제품을, 1986년 주교품을 받았으며, 2002년 10월 8일 제주교구장에 착좌했다. 다음은 강 주교와의 일문 일답이다.
▲ 2월 14일이면 주교수품 25주년이십니다. 소회가 남다르실 것 같습니다.
- 벌써 25년이란 세월이 흘러갔네요. 그동안 주교로서 그런대로 많은 사람들에게 사랑받으며 살 수 있게 해주신 하느님 은혜에 감사드릴 뿐입니다. 이제 슬슬 퇴장해야 할 때가 된 것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 제주교구장으로서의 삶을 간략히 소개해주시겠습니까.
- 제주교구는 가족적인 분위기, 친밀하고 깊은 인간관계가 구축돼 사목하기에 좋은 환경을 갖추고 있습니다. 주교와 사제, 사제와 사제 간 친밀한 관계는 어디에 내놓아도 모범이지 않을까 합니다. 또 제주도는 하느님께서 만드신 대자연의 아름다움을 그대로 느낄 수 있는 곳이어서 심신이 편한 곳이기도 합니다. 점심 후 시간이 나면 사려니 숲길에서 산책도 하고 테니스도 치고 있습니다. 복 받은 삶을 살아가고 있지요. 하루하루가 감사할 뿐입니다.
▲ 주교님께서 생각하시는 ‘주교란’ 어떤 자리인가요.
- 교회의 존재 이유는 하느님을 아버지로 모시는 하느님 백성이 함께 살아갈 수 있도록 이끌고 엮어가는 데 있습니다. 주교는 하느님으로부터 은사를 받은 교회의 각 구성원들을 잘 활용해 서로 돕게 하고 그 안에서 시너지 효과를 창출하도록 이끌어야 합니다. 흩어진 하느님의 백성을 모아 잘 엮어 주는 역할을 하는 ‘하느님의 도구’가 바로 주교라고 생각합니다.
▲ 평소 강론을 잘 하시는 주교님으로 정평이 나 있습니다. 강론 준비는 어떻게 하시는지 궁금합니다.
- 강론은 언제나 부담스럽습니다. 장시간 준비하지 못하지만 지금 여기 예수님께서 계신다면 어떻게 말씀하셨을까를 항상 생각합니다. 성령께도 항상 마음을 열어드리기 위해 노력합니다. 그리고 모든 교우들이 쉽게 알아들을 수 있게 말할 수 있도록 노력하고 있어요. 예수님께서도 누구나 알아들을 수 있게 쉽게 말씀하셨잖아요. 쉽게 말하는 것이 가장 어려운 것 같습니다.
▲ 고 김수환 추기경님과도 많은 추억을 품고 계실 듯합니다.
- 추기경님을 직접 뵌 것은 일본 신학교 철학과에 재학 중일 때였습니다. 추기경 서임 발표 직후에 저를 찾아오셨을 때였죠. 당시에는 ‘추기경님께서 나한테까지 와주시는가’라는 생각에 깜짝 놀랐습니다. 그리고 나서 신학교 교수 신부님들과 함께 축하모임을 했던 기억이 납니다. 이후 사제품을 받고 나서는 줄곧 추기경님과 함께했습니다. 자연을 벗삼아 등산하시는 것을 좋아하셔서 제가 자주 모시고 다녔어요. 추기경님도 꽤 스피드를 즐기셨는데 운전기사 대신 제가 운전해 속력을 높이면 신난다는 표정이셨습니다.
▲ 주교님께서 기억하시는 김 추기경님은 어떤 분이신가요.
- 김 추기경님은 감성주의자셨어요. 늘 힘없는 사람, 가난한 사람들에게 직접 다가가길 원하셨습니다. 격식과 권위를 없애고 가난한 사람들이 사는 동네에 찾아가셔서 소박하게 담소도 나누시고 음식도 나눠드시고 오락도 함께 즐기셨어요. 정말 행복해 하셨습니다. 저 또한 가난하고 소외된 이들을 찾아 그들과 함께 했는데 이런 가치관이 비슷해서인지 추기경님께서는 저에게 당신의 속내까지 부담 없이 말씀하셨습니다.
▲ 올해 사목지침서에서 지역사회와 어우러지는 소공동체를 강조하셨습니다.
- 그리스도교 신앙의 핵심적 교리인 ‘강생의 신비’는 인간과 그의 세상 전체에 대한 하느님의 관심과 구원을 전제로 하는 가르침입니다. 구원이 정신적·영적인 것에 국한된 것이라면 예수님께서 굳이 사람이 되어 세상에 오시고 십자가에 못박히실 필요도 없었을 것입니다. 이 강생의 신비를 받아들인다면 우리가 세상 속에서 사신 예수님과 함께 살아야지 따로 천당에 사는 것만 생각해서는 강생의 교리를 이해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의미에서 교회는 세상을 교도하는 우월감 갖는 단체가 아닙니다. 세상과 함께 아파하고 세상의 고뇌를 함께 짊어져야 하는 것입니다. 세상이 비록 오염되고 타락했더라도 이에 도피하거나 외면하지 않고 그 한복판에서 씨름하며 하느님의 자비와 사랑과 평화를 선포하지 않는다면 그런 교회는 결과적으로 자신의 정체성을 부정하는 것입니다. 교회는 태생적으로 처음부터 세상 속에서 사회적 관심을 갖고 살아갈 수밖에 없습니다.
▲ 소공동체에 대해서는 제주교구장으로 부임하시면서부터 꾸준히 강조해 오셨는데요.
- 세계교회의 시대적인 흐름과 징표를 봤을 때 교회가 가야할 길은 소공동체 밖에 없다고 생각합니다. 물론 소공동체가 쉽지 않은 길이에요. 신자유주의가 만연한 한국사회에서 갈수록 뿌리 내리기 힘든 것 또한 사실입니다. 하지만 신자유주의로 물든 사회악을 조금씩 허물기 위해서는 공동체가 함께 대처할 수 있는 소공동체 모습이 돼야 합니다. 혼자서는 싸우기가 어렵습니다.
▲ 사목지침서 실천사항으로는 사회교리 공부하기를 강조하셨습니다. 특별한 이유가 있으신가요.
- 교회가 믿을 교리는 강조해왔지만 지킬 교리에 대해서는 소홀했습니다. 주로 개인적인 윤리나 신앙 실천 차원에서 가르쳐 왔어요. 사회적·집단적 차원의 교회 가르침은 거의 백지 상태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사회교리는 지킬 교리인 십계명을 실제 어떻게 지키고 살아가야 하는지 풀이해 놓은 것이라 할 수 있어요. 사회문제에 대한 교회의 가르침인 사회교리를 배우고 이를 근거로 다양한 분야의 사회문제를 식별해나가야 합니다. 전 국민이 신자가 되면 뭐하겠습니까. 오히려 예수 그리스도의 참 제자 한명을 만드는 것이 교회가 해야 할 몫이라 생각합니다.
▲ 제주교구가 당면한 현안들도 많겠지요. 제주 해군기지 문제도 교회 안팎에서 논란을 일으켜온 중대한 문제인데요.
- 역대 현대 교황님들께서는 끊임없이 정치 지도자들에게 군비를 축소해야 한다고 강조하셨습니다. 군비증강으로 평화를 담보할 수 없다고 하셨습니다. 이는 그동안 수없이 반복됐던 역사를 통해 입증되고 있어요. 제주 해군기지가 염려스러운 것은 바로 군비증강으로 한반도 긴장을 고조시키기 때문입니다. 군사기지가 들어서면 중국을 겨냥한 이지스함이 입항하게 될 것입니다. 중국에서 볼 때 자국의 안보를 위협하는 전진기지로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 것이죠. 북한과 가장 멀리 떨어져 있는 제주가 가장 위험한 전초기지로 전락해 버리고 맙니다. 동북아의 평화를 위해서도 제주 해군기지 건설은 결코 바람직하지 않습니다.
▲새해를 맞아 교구민들에게 덕담 한 말씀 부탁드립니다.
-그동안 열악한 환경 속에서도 열심히 신앙생활에 임해온 교구민들께 감사드립니다. 혼자서는 해결하지 못하는 일도 공동체 안에서 함께하면 가능합니다. 이러한 믿음을 갖고 현실을 예리하게 보고 고민하며, 공동체가 함께한다면 용기와 지혜가 생겨 이겨낼 수 있을 것입니다.
▲ 강 주교는 올해 사목지침을 통해 세상과 함께 아파하고 세상의 고뇌를 함께 짊어지는 교회의 모습을 교구민 모두가 실현할 것을 당부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