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해 가을 벨기에의 브뤼게를 방문한 첫 인상은 ‘지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도시’였다. 북유럽 특유의 뾰족한 지붕의 주택들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지는 시가지는 정결하고, 운치가 있었다. 운하를 따라 이어지는 아름다운 거리는 이탈리아 베네치아를 옮겨놓은 듯도 하였으나 해가 없는 흐린 날씨는 북유럽 특유의 냉정함을 풍겼다.
브뤼게는 플랑드르 지역의 대표도시 중 하나로 미술사에서는 특별히 북유럽 르네상스의 발상지로서 중요하다. 이탈리아의 르네상스가 15세기 초 피렌체에서 탄생했다면 북유럽 르네상스는 브뤼게를 비롯한 동시대 플랑드르 지역에서 탄생했다.
문명의 탄생지라 함은 정치, 경제, 문화의 중심지였음을 뜻한다. 브뤼게 역시 예외가 아니어서 그다지 크지 않은 도시에 상상을 초월하는 대형 성당들이 몇 백미터 간격으로 세워져 있는 것만 보아도 한때 이 도시가 얼마나 융성했었는지를 짐작하게 했다. 대규모 성당들이 세워졌다는 것은 성당을 세울 자금이 충분했다는 뜻이고, 이는 결국 시민들과 후원자들이 경제적으로 풍요로웠음을 의미한다. 당시 유럽의 부유한 상인들과 귀족들이 가장 중요시 여긴 일이 성당을 세우고 예술가들에게 작품을 주문하여 좋은 작품을 성당이나 시청사 등에 봉헌하는 일이었기 때문이다.
실제로 브뤼게는 각 나라의 상인들이 이곳에 집결하여 무역을 한 상업의 중심지였다. 오늘날의 뉴욕과 흡사했을 것이다. 무역을 통한 상업의 교류는 미술 교류로 이어진다. 당시 플랑드르에서 꽃핀 특유의 정교함을 바탕으로 한 플랑드르 회화가 이탈리아, 스페인, 독일, 프랑스를 비롯한 전 유럽 미술가들에게 영향을 주게 된 것도 이곳 작가들의 작품들이 타 국가에 전해졌기 때문이다. 당시 이탈리아 귀족이나 부유한 상인들 사이에서는 플랑드르 작가의 그림을 컬렉션 하는 것이 크게 유행하였고, 물품을 가득 실은 배 안에는 미술품도 상당수 있었으며, 자연적으로 화가들은 선진 회화라 할 수 있는 플랑드르 화풍의 영향을 받게 되었다. 보티첼리나 레오나르도 다빈치와 같은 작가의 작품에서 플랑드르 회화의 영향이 강하게 나타나는 이유도 이 때문이다.
브뤼게에 한스 멤링(1435/40~1494) 미술관이 있다. 멤링은 얀반 에이크와 반 데르 바이덴의 계보를 이은 플랑드르의 대표적인 화가다. 원래 이 미술관은 1150년에 세워진 성 요한 병원으로 19세기 초 의대 건물로 쓰이기 전까지 이 도시의 병원이었고, 1990년에 한스 멤링 시립 미술관으로 자리 잡게 되었다.
병원 건물이 멤링 미술관으로 변신하게 된 이유는 이곳에 멤링의 대표작 ‘성녀 우르술라의 성체함’이 소장되어 있기 때문이다. 멤링은 종교 단체의 주문을 받고 성 요한 병원을 위해 ‘성녀 우르술라의 성체함’을 제작했고, 1489년, 성녀의 축일인 10월 21일 성녀 우르술라의 유골이 멤링이 새로 제작한 성체함으로 옮겨졌다. 이 중요한 행사에 성체함 제작자인 화가 멤링도 있었다.
성체함의 모양은 지붕, 기둥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당시 유행하던 고딕 양식의 교회 모양을 하고 있다. 벽 부분은 모두 그림으로 채워졌는데 앞·뒤 면에는 성 모자상과 성녀 우르술라가 그려져 있고, 벽 부분에는 성녀 우르술라의 일화들이 6개의 장면으로 나뉘어 그려져 있다. 성체함에 그려진 성녀 우르술라의 생애는 ‘황금전설’에서 따온 것으로 성녀가 수많은 처녀들과 함께 로마를 순례한 후 독일 쾰른에서 순교하기까지의 여정을 담고 있는데 멤링의 대표작일 뿐만 아니라 이 성녀의 일화를 다룬 그림으로는 가장 유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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