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희가 내 형제들인 이 가장 작은 이들 가운데 한 사람에게 해 준 것이 바로 나에게 해 준 것이다.”(마태 25,40)
이 성경말씀을 늘 마음속 깊이 품고 실천해왔던 고 이태석 신부. 그는 가장 소외된 이들과 함께하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닮은, 이 시대의 참 ‘사제이자 선교사’였다.
치유자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닮아가며
2001년 11월, 이태석 신부는 남과 북으로 갈라져 내전이 한창이었던 수단 남부의 톤즈로 향한다. 전쟁의 상처보다 더 심각한 것은 그들이 처한 열악한 환경이었다. 아이들은 오염된 강물을 마셨고 피부병과 전염병에 그대로 노출돼 있었다. 이들은 말라리아와 장티푸스 등의 질병에 자주 걸렸다. 병명조차 알지 못한 채 죽어가는 이들도 많았다. 이 신부는 급한 대로 움막진료소를 만들었다. 의사가 있다는 소식에 환자들은 빠르게 몰려들었다. 100km 이상을 걸어와 치료를 받는 이도 있었다. 그는 쉬지 않고 밤낮으로 환자를 돌봤다. 그가 하루 평균 돌본 환자는 300여 명이 넘었다.
그는 환자들을 밤낮으로 돌봐가며 그들 안에 머무르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체험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그 누구보다 가난하고 소외된 이들 곁에서 마음 아파하시는 분이시다. 그는 그가 체험한, 치유자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 이같이 말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특히 가난하고 버림받은 이들에게 더 큰 사랑과 관심을 보여주셨습니다. 그것은 아홉을 가진 부자에게는 하나만 주면 열이 되지만 하나를 가진 이들에게는 아홉을 주어야 열이 될 수 있음을 아셨기 때문인 것 같습니다.” 환자들과 함께하며 체험한, 치유자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그의 믿음은 그에게 가난한 이들에 대한 끝없는 사랑의 열정을 불러 일으켰다.
소외된 이들 중 가장 소외된 이들 곁에서
톤즈에서 유일한 의사였던 이태석 신부는 평소 80여 개 마을을 찾아다니며 이동진료를 했다. 거동이 불편한 환자들을 배려해서였다. 그중 가장 애정을 쏟은 곳은 60여 명의 한센병 환우들이 모여살고 있는 ‘쵸나’라는 마을이었다. 톤즈는 모두가 가난한 곳이었지만 그중에서도 정말 찢어지게 가난한 사람들이 모인 곳이었다. 그는 틈만 나면 이들을 만나러 갔다. 처참하기 이를 데 없고 가장 버림받은 삶이 분명했지만 그 안에서 그들을 위로하며 함께하시는 예수님의 존재를 느낄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는 갈 때마다 예수 그리스도의 부족한 손과 발이 되어 그들과 함께 살고 싶은 강한 소명을 느꼈다.
한센병 환우들에 대한 이 신부의 정성은 지극했다. 고름을 직접 짜고 붕대를 감아 줬으며, 치료제와 함께 복용법에 대한 세세한 설명도 잊지 않았다. 제대로 된 거주지조차 없던 이들에게 벽돌집도 만들어 줬다. 제각각의 발을 가진 환우들을 위해 그들의 발을 직접 그려 신발까지 제작해 준 것도 그였다.
이 신부는 평소 마음속에 품고 있던 성경말씀인 “너희가 내 형제들인 이 가장 작은 이들 가운데 한 사람에게 해 준 것이 바로 나에게 해 준 것이다”(마태 25,40)를 그의 삶 안에서 실천에 옮겼다. 그리고 그는 오히려 한센병 환우들과의 만남을 감사해했다. 열악한 환경이었지만 후회 없이 기쁘게 살 수 있게 해주었고, 주님의 존재를 체험하게 만들어준 이들이 바로 한센병 환우들이었기 때문이다.
▲ 이태석 신부와 한센병 환우 마을의 아이들. 이태석 신부는 톤즈에서도 가장 가난하다고 손꼽히는 이들과 많은 시간을 함께 보냈다.
▲ 이태석 신부는 청소년들이 가진 전쟁의 상처를 치유하기 위해 ‘브라스 밴드’를 조직했다.
청소년들에게 희망을 선물하다
환자들을 돌보는 것도 시급한 일이었지만 학교가 없어 하루 종일 빈둥거리며 거리를 헤매는 젊은이들 또한 방치할 수 없는 문제였다. 교육만이 가난한 이곳 톤즈 사람들을 구원할 유일한 방법이라 생각했다.
이 신부가 가장 먼저 한 일은 전쟁으로 폐허가 된 학교를 다시 짓는 일이었다. 마을 사람들과 함께 톤즈 강에서 모래를 퍼왔고 시멘트는 케냐에서 공수해 왔다. 집이 먼 학생들을 위해서 기숙사도 만들었다.
이러한 열정 때문이었을까. 아이들의 학구열은 갈수록 높아졌다. 제한된 전기를 이용해 늦은 밤까지 공부할 수 있게 해달라며 이 신부를 조를 정도였다.
이 신부가 아이들을 위해 각별히 신경 쓴 것이 하나 더 있다. 이 신부는 이들의 상처를 치유하기 위해 음악을 가르쳤다. 장기간의 전쟁으로 아이들의 마음은 상처받고 부숴져 있었다. 음악으로 상처받은 아이들의 마음에 기쁨과 희망의 씨앗이 심어질 수 있길 바랐다. 그래서 만들어진 것이 남부 수단 최초의 ‘브라스 밴드’였다.
음악을 통해 아이들은 변해갔다. 아이들은 특유의 아프리카 리듬감으로 음악을 즐겼고 소통하는 법도 배워나갔다. 얼었던 마음도 서서히 녹아갔다. 아이들은 언제부터인지 총과 칼을 녹여 클라리넷과 트럼펫을 만들고 싶다고 했다.
선종하기 몇 개월 전 이태석 신부는 톤즈에서 아이들과 함께했던 추억에 대해 이렇게 소회했다. “음악을 통해 아이들이 내적으로 성장한 모습을 볼 수 있어 참 행복했습니다. 그리고 제가 더 고마웠습니다. 처음에는 워낙 가난한 아이들이어서 여러 가지 계획을 세웠어요. 그러나 시간이 지날수록 아이들에게는 같이 있어주는 것이 가장 중요한 것임을 깨닫게 됐습니다. 어떤 어려움이 닥친다 해도 그들을 버리지 않고 함께 있어주고 싶습니다.”
▲ 이태석 신부가 선물한 새신발을 신고 이 신부와 함께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 한센병 환우들.
영혼의 전문가가 되기 위해
이 신부는 가톨릭, 개신교, 이슬람교 등 종교로 사람을 구분 짓지 않았다. 도움이 필요한 사람들에게 도움을 주고 희망을 잃은 이들에게 희망을 주고 사랑을 잃은 이들에게 사랑을 주는데 종교의 구분은 무의미하다고 생각했다. 그가 생각하는 진정한 선교는 결과나 수치 등에 매몰 되지 않고, 오직 예수님의 깊고 넓은 사랑의 모습을 사람들에게 보여주는 것이었다.
그가 활동한 톤즈는 토속신앙이 강한 곳이었다. 무당과 주술사를 합쳐 놓은 사람인 ‘꾸쥬르’에 대한 믿음은 거의 맹목적인 수준이었다. 꾸쥬르의 말만 믿고 단순한 병을 키워 죽는 경우도 흔히 발생했다. 이러한 문화는 분명 선교하는데 있어 장애물이었다. 하지만 그는 톤즈의 전통 문화를 부정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 전통 문화를 존중했고 이해하려 노력했다. 나아가 그는 이 토속신앙을 가톨릭 신앙이 뿌리내릴 수 있는 장점으로 활용했다. 그들의 토속신앙은 정신적인 것들에 많은 가치를 부여하고 있었고 이는 그리스도교를 심어주는 데 조금이나마 도움이 될 수 있었다.
그가 선교하며 가장 중요하게 생각한 것이 있다. 이들의 고통과 아픔을 함께 나누고 호흡하는 것이었다. 그가 행한 희생과 봉사는 이들에게 예수님의 모습을 보다 더 쉽게 느끼게 했던 복음화의 밑거름이었다. 이태석 신부는 선교사로서 이후 이렇게 말했다.
“멋진 말은 사람들을 감동시킬 순 있어도 영혼을 감동시키거나 변화시키기엔 턱없이 부족합니다. 영혼을 감동시키거나 변화시킬 수 있는 것은 오직 두 영혼의 진실한 만남을 통해서만이 가능합니다. 우리의 진실한 눈빛과 작은 희생, 봉사를 통해 이들은 예수님을 느끼거나 예수님의 모습을 보게 되고, 그것으로 인해 그들의 영혼에 작은 변화의 물결이 일어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영혼의 전문가가 돼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