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등동성당에서 조그만 길을 건너 집 한 채가 있었는데, 그곳에 수녀님들(샬트르 성바오로수녀회)이 살고 계셨죠. 그때도 장금구 신부님(당시 북수동본당 주임)과 연락을 계속 취하며 준비를 해왔는데, 신부님은 고등동성당 안에 수녀님들을 위한 방을 새로 만들고, 수녀님들이 살던 집을 교구청 겸 주교관으로 만들면 되겠다고 생각하셨어요. 그렇게 해서 결국 착좌식 후부터 그곳에서 살게 된 거예요.
이처럼 장 신부님께서 착좌식 전부터 많은 도움을 주셨기에, 나를 도와 수원교구 정착에 앞장서줄 인물로 장 신부님이 적당하다는 판단이 섰어요. 착좌식 때 신부님을 총대리 신부로 임명했죠. 착좌식을 마친 후 축하연에서 라틴어로 임명장을 만들어 발표했어요.
▲ 윤공희 대주교 수원교구장 시절.
지금 와 생각해보니 착좌식은 단순했어요. 법적으로 교황님의 칙서를 발표하는 것 외에는 기도하고, 성가 부르고, 주교좌에 착좌하는 예식 하나가 포함됐죠. 오히려 예식보다는 주교예절 복장이 참 복잡했어요. 붉은 수단 뒤에 긴 꼬리(라틴어 ‘까우다’)가 있었는데, 너무 비싸 구할 수 없어서 노기남 대주교님 것을 잠시 빌려 사용했지요.
그 다음 공의회 갈 때마다 새로 만들까도 생각했지만 너무 비쌌어요. 500달러나 했으니 살 수가 없었죠. 하지만 공의회 이후에는 그 꼬리가 없어졌기에 더 신경 쓰지 않아도 됐어요.
축하연 장소를 구하기 위해 애썼던 일도 생각이 납니다. 교구청에는 잔치를 할 수 있는 마땅한 장소가 없었어요. 그래서 서울대학교 농과대학 강당을 빌려 쓰게 됐죠.
착좌식은 했지만 재정적으로는 준비된 바가 없어 어려움도 있었어요. 그때부터 장부를 쓰기 시작했죠. 착좌식 예물부터 하나씩 적어나갔어요. ‘수원교구 재정의 첫 걸음’이 시작된 것이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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