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께서 성전에서 『채찍을 만들어 양과 소를 쫓아내고 환금상들의 돈을 쏟아 버리며 그 상을 둘러엎으셨다』라는 오늘 복음말씀에 나오는 예수님의 모습은 자못 과격해 보이기까지 한다. 이 예수님의 모습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사실, 성전 경내에 있던 환전상이나 장사하던 사람들은 제사 바치는데 필요한 것들(예컨데, 헌금이나 성전세로 바칠 돈 제물로 바칠 동물들)을 가까운 곳에서 찾아야 했던 많은 사람들(특히 멀리 외국에서 온 순례객들)에게 편의를 제공하는 긍정적 역할도 했다고 볼 수 있다. 예수님 시대에는 성전에서 바치는 돈(헌금이나 성전세)으로는 옛 화폐만을 받았었기 때문에, 성전예배에 참석하는 사람들은 그 당시 일반적으로 사용하던 화폐를 성전 뜰에 있던 환전상들로부터 환전을 해야했다고 한다.
예수님의 「성전정화」행위에 관하여 학자들 사이에는 트게 두 가지 해석이 있다. 하나는 성전 경내에서의 「상행위의 남용」을 질타하는 행위라고 보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동물제사를 바치는 식의 예배자체를 부정하는 행위라고 보는 해석이다. 『내 아버지의 집을 장사하는 집으로 만들지 말라』라는 예수님의 말씀을 보면, 「성전정화」를 상행위의 남용을 질타하는 행위로 보는 해석이 무난하다고 여겨진다. 하지만 오늘 복음에 나오는 예수님의 모습은 「형식적 경신례」를 질타하던 예언자들의 모습, 다시 말해 정의와 자비를 요청하는 하느님의 뜻을 실천할 생각은 하지도 않으면서도, 습관적으로 희생제물만 거창하게 봉헌하면 하느님께 예배를 제대로 드린 것으로 생각하며 안주하던 당대의 신앙인들 (특히 지도자들)을 매섭게 질타하던 예언자들의 모습(예컨대 예레 7장 이사 1장)을 또렷하게 연상시킨다.
그리고 요한 복음서 안아세 「성전정화」의 행위는 깊은 상징적 의미도 가지고 있다. 요한복음서에서 성전정화 이야기는 다른 복음서들에서와는 달리 공생활 초기에 배치되어 있는데, 그 바로 앞에 나오는 「가나의 혼인잔치」와, 뒤에 나올 「예수님과 사마리아 여인과의 대화」가운데 나오는 「영과 진리 안에서 드리는 참된 예배」라는 주제(4,20~24)와 깊이 연결되어 있다. 「충만한」과 「풍요로움」을 상징하는 혼인잔치를 통해 「하느님의 나라」가 계수와 함께 이미 시작되었다는 것을 표현한 요한 복음사가는 「성전정화」이야기를 통해 「참다운 예배」는 이제 「새로운 성전」인 부활하신 예수님을 통해서 가능하게 되었다는 점을 말하려고 하는 것이다. 성전이란 「하느님께서 현존하시는 장소」이며, 그래서 그곳을 인간이 「하느님과 만날 수 있는 장소」요 「하느님께 예배드릴 수 있는 장소」라고 말할 수 있다면, 부활하신 예수님이야말로 그곳에서 인간이 참으로 하느님을 만나 뵙고,, 하느님께 참된 예배를 드릴 수 있는 「새로운 성전」이라고 표현하는 요한복음의 말씀도 이해할 수 있다. 요한 복음에 의하면 예수님은 하느님의 현존과 계시의 장소요(참조: 1,14 10, 30 14, 6~11), 생명수가 넘쳐흐르는 영적인 새로운 성전(참죄 7,37~39 19, 34)이시다.
여기서 역사적 사실 한 가지를 상기해 볼 필요가 있다. 요한 복음서가 기록될 당시는 예루살렘성전이 파괴된 지(기원후 70년) 이미 20여년이 지난 후였다. 유다인들이 그토록 자랑스러워했던 그 성전은, 유다인들의 왕으로서는 여러 가지 면에서 정통성이 결여되었던 헤로데가, 신앙도 없으면서 유다민중의 환심을 사기 위해, 기원전 19년경부터 희랍-로마 양식으로 화려하고 거창하게 개축을 하도록 지시한 결과였다. 피폐하였던 유다백성의 그 많은 땀과 혈세를 들여 화려하게 개축하였던 성전이 불과 7년만에 로마인들에 의하여 무너지고 만 것이다.
이러한 역사적 사실과 함께 「기도하는 집」을 「장사하는 집」으로 바꾸던 사람들을 무섭게 질타하시는 오늘 복음의 예수님의 모습은 우리 신앙인들에게 과연 어떻게 하는 것이 참으로 하느님을 경배하는 일인지 곰곰히 반성하게 한다. 요한 복음서에서는 『영과 진리 안에서 아버지께 드리는 예배』(4,23)에 대하여 말한다. 그런 예배는 이미 예언자들이 보여주었고, 하느님 아버지께 이르는 참된 길(14,6)이신 예수님께서 몸소 보여주신 대로, 사람들이 벽돌로 쌓아올린 외적인 성전 테두리에 갇혀있는 예배가 아니라, 그러한 성전이 무너지더라도 언제 어디서나 지속될 수 있는 예배일 것이다.
정화의 시기인 사순절에 다시 듣게되는 예수님의 「성전정화」에 관한 이번 주일의 복음말씀은 예수님을 주님으로 믿고 따르려는 우리 그리스도 신앙인들로 하여금 자신의 삶을 뒤돌아보게 한다. 오늘의 시대에 「성전을 더럽히는 행위」란 어떠한 것일까? 오늘의 시대에 예수님께서 등장하시면 「채찍을 만들어 깨끗이 쫓아내 정화하고 싶으실」만한 성전은 과연 없다고 할 수 있는가? 혹시라도 「성전」이라고 하는 곳이, 하느님을 경경한다는 것은 말뿐이고, 실질적으로는 갖은 이해관계로 뒤얽혀 서로 미워하고 질투하며 암투를 벌이는 사람들의 장소가 되어 버린 곳이 있다면, 그곳이야말로 마땅히 「정화되어야 할 곳」이 아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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