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월 26일은 안중근 의사의 순국 90주기이다. 일제 암흑기에 민족적 양심과 신앙의 가르침에 따라 침략의 원흉을 처단함으로써 만천하에 그 기개를 떨쳤던 안의사에 대한 숭모의 염은 오히려 해를 거듭할수록 더해지고 있다. 순국 90주기를 맞아 그 뜻을 기리고 의거를 살인행위로 단정했던 한국 가톨릭교회의 자세를 다시 한번 되돌아 본다.
1. 안중근 순국 90주기
오는 3월 26일은 안중근 순국 90주기이다. 한말(韓末) 대표적인 민족운동가였던 안중근은 당시의 사회 요구에 응하면서 애국계몽운동과 무장독립전쟁을 전개하였다. 그리고 1909년 10월 26일 한국침략의 원흉인 이토오 히로부미(伊藤博文)를 하얼빈 역에서 처단하였다. 1897년 1월 세례 이후 1910년 3월 10일 일제에 의해 사형당할 때까지 결코 멀리 하지 않았던 천주교 신앙은 안중근의 모든 언행에 커다란 영향을 미쳤다.
2. 정교분리 교회 선교정책과 일제 종교정책
1905년 한국이 사실상 일본의 지배 아래 놓이게 되면서 교회도 일제 식민통치의 영향을 받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일제가 식민정책의 일환으로 제시한 정교분리(政敎分離) 종교정책은 한국 천주교회의 선교정책과 결합함으로써 일제에 의한 한국사회의 비민족화(非民族化) 정책에 교회가 간접적으로나마 기여하는 결과를 낳게 하였다. 그리고 교회의 이러한 태도는 일제가 천주교회 자체를 비민족화하려할 때에도 저항하기 어렵게 만드는 요인으로 작용하였다.
통감부 시기 한국 천주교회는 정교분리 선교정책을 주장하였다. 당시 한국 천주교회가 정교분리정책을 주장한 것은 선교권을 보장받기 위해서였다. 그런데 교회가 주장했던 정교분리에는 많은 문제점이 있었다. 정교분리란 정치와 종교가 서로의 영역을 침해하지 않고, 침해당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러나 교회가 강력히 주장하였던 정교분리원칙은 일제의 식민정책에 동조하는 것이었다.
3. 교회와 민족
그러나 모든 천주교신자들이 민족의 현실을 외면한 것은 아니었다. 안중근에게서 식민지 시기 한국 천주교회의 이상을 찾을 수 있다. 안중근의 천주교 선교대상은 동포였다. 그는 천주교를 통해 개인 구원만을 바란 것이 아니었다. 그에게 천주교 수용 목적은 개인 구원을 넘어 동포의 구원으로 이끌어졌다. 그는 천주교를 신앙하면 현세에서는 평화로운 도덕사회를 실현할 수 있고, 내세에서는 만인 구원을 이룩할 수 있다고 하였다. 당시 한국에서 선교 중이던 선교사들은 하느님의 나라와 세상의 나라를 엄격히 구분하는 전통 신학을 공부한 이들이었다. 따라서 그들은 정교분리 원칙을 내세우며 천주교 신앙을 내세의 구원으로만 가르쳤다. 그러므로 현세의 도덕사회 실현도 희망하였던 안중근의 천주교에 대한 인식은 매우 주체적인 것이었다.
안중근은 민족과 교회를 참으로 조화롭게 이해하였다. 안중근은 청년기 이후 당시 한국사회의 요구에 호응하면서 애국계몽운동과 독립전쟁을 전개하였다. 그리고 그의 그러한 활동 배경에는 당시의 사회사상과 천주교 신앙이 동시에 작용하였다. 안중근의 천주교 선교 대상은 한민족이었다. 그는 천주교를 통하여 한민족의 구원을 열망하였다. 그에게 천주교 수용의 목적은 개인 구원을 넘어 한민족 구원으로 이끌어졌다. 그는 선교사를 도와 선교 활동을 전개하는 동안 천주교 신앙 뿐 아니라 서양의 근대 사상과 문명 지식도 습득할 수 있었다. 그는 천주교를 통하여 현세를 도덕사회로 만들 수 있으며 태평을 누릴 수 있다고 하였다. 또한 천주교를 받아들이면 문명국을 만들 수 있으니 한국을 문명국으로 만들기 위해 천주교를 믿어야 한다고 하였다.
4. 의열투쟁? 살인행위?
1909년 10월 26일 안중근은 하얼빈 역에서 이토오 히로부미를 처단하였다. 그는 이토오를 일본의 천황까지도 속인 불충한 인물이고 조선 침략의 원흉이라고 판단하고 오래 전부터 그를 제거하려 하였다. 즉 안중근이 이토오를 제거한 것은 민족주의 운동을 진행하던 과정에서 확신을 갖고 추진해오던 일을 이룬 것이었다.
그런데 당시 한국 천주교회의 수장 뮈텔 주교는 안중근에게 이토오를 제거한 것은 이토오에 대한 순전한 오해 때문이라는 사실을 공개적으로 선언할 것을 강요하였고, 이러한 선언을 해야만이 고해성사를 주겠다고 위협하였다. 사형이 언도되자 안중근은 뮈텔 주교에게 전보로 신부를 보내주도록 청하였다. 그러나 뮈텔 주교는 안중근의 요청을 거절하였다. 그는 한국에 실질적인 통치권을 행사하고 있던 일본 식민당국과의 관계를 고려하지 않을 수 없었다. 뮈텔 주교는 안중근 사건으로 교회에 미칠지도 모르는 불이익을 염려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안중근은 이러한 교회 통치권의 요구를 거절하였다. 그는 이토오를 죽인 것은 정당 방위이므로 잘못이 아니며, 인도(人道)를 떠났거나 인도에 어긋난 일로도 생각하지 않는다고 하였다. 살인은 성서에도 금지되어 있지만 이토오는 사람들을 죽였으므로 한국과 희생된 사람들을 대신해서 자신이 그를 죽였으니 그것은 정당 방위라는 것이었다. 또한 이토오를 제거한 것은 전쟁 중 군인으로서 행한 것이므로 정당한 행위이고, 이 전쟁은 빼앗긴 한국의 독립을 쟁취하기 위한 전쟁이기 때문에 정당한 전쟁이라고 강조하였다. 그는 자신의 행동이 정당함을 확신하고 있었고, 이러한 그의 확신은 그가 처해있던 상황에 대한 역사적 통찰의 결과로 내릴 수 있었던 당연한 판단이었다.
선교를 위해 파견되었던 선교사들에게 한민족과 같은 공감대의 형성을 요구한다는 것은 어려운 일이었다. 그러나 안중근에게 교회와 민족은 둘 중 어느 하나만을 선택할 수 있는 대상이 아니었다. 그는 교회도 민족도, 둘 중 어느 것도 포기할 수 없었다. 따라서 그는 교회를 등지지 않았고, 이토오를 처단하고 사형당할 때까지 민족을 위해 봉사할 수 있는 천주교 신앙을 간직하였다. 안중근에게서 민족에게 봉사하는 교회에 대한 이해를 배울 수 있다.
5. 2000년 대희년 - 참회와 용서
3월 12일, 교황청은 정의롭고 용기있는 발표를 하였다. 2000년 대희년을 맞이하여 교회가 행한 역사적인 과오를 전 인류를 향해 공식 발표함으로써 진정한 참회를 이루었기 때문이다. 전 세계 가톨릭의 교도권자이며 보편 교회인 교황청의 이 선행(先行)은 지역 교회에 많은 가르침을 주고, 의무도 부여하였다. 한국 교회에도 교황청의 용기있는 행동은 교훈이 된다.
한국 천주교회는 안중근의 이토오 처단 행위를 살인 행위로 규정하였고, 교회의 이러한 시각은 오랜 동안 변함이 없었다. 교회사학자들에 의해 안중근 의거가 긍정적으로 평가되는 노력이 축적되고, 1990년대 초 한국 교회 최고 통치권자가 집전한 미사에서 안중근 의거에 대한 교회의 과거 행동에 대한 반성이 이루어졌다. 오늘날의 한국 교회가 있기까지 헌신한 선각자들과 선교사들의 헌신은 아무리 칭찬해도 부족하지 않다. 그러나 그 안에서 이루어졌던 인간적인 아쉬움을 이제는 보다 정확히 인식하고 인정할 때에 이르렀다고 여겨진다. 그 실수를 인정한다고 공로가 경감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그 실수를 인정할 때 더욱 아름답게 빛난다.
교회를 위해서였다지만, 한말 국권이 강탈되어가던 당시에 민족문제를 외면하라던 교회의 가르침은 한민족의 민족정서를 거스르는 것이었다. 또한 그것은 침략행위에 교회가 눈을 감은 것이었으며, 침묵으로서 동조하는 결과를 낳았다. 민족에게 봉사하는 교회만이 전 세계의 공동 선을 향해 봉사하는 교회로 나아갈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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