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주의 대부(代父)」, 「광주의 정신적 지주」로 존경받아온 광주대교구장 윤공희(빅토리노) 대주교가 20일 사제서품 금경축(50주년)을 맞았다. 5·18 광주민주항쟁을 계기로 일반인들에게도 널리 알려진 윤대주교를 금경축 기념일을 며칠 앞둔 17일 그의 집무실에서 만났다.
『잘 지내고 있어요. 건강이야 늘 좋고. 최창무 대주교님께서 오시고부터는 본당방문이나 모임, 행사 등 모든 업무를 분담해서 하고 있어요. 일은 많이 덜었지만 바쁘게 사는 것은 여전해요』
기자 일행을 환한 미소로 반갑게 맞이하는 윤대주교. 자그마하지만 다부져 보이는 체구에 주름도 별로 잡히지 않은 얼굴이 일흔일곱의 나이를 짐작키 어렵다. 희끗희끗하지만 단정하게 빗어넘긴 머리가 반백년을 그리스도의 대리자로, 우리 민족의 고비때 마다 현장을 지켜보며 살아온 그의 삶을 대변하듯 경륜을 느끼게 한다.
평안남도 진남포가 고향인 윤공희 대주교는 1937년 함경남도 덕원신학교 중등과에 입학했다. 49년 신학교가 북한 공산당에 의해 몰수되자 50년 1월, 고인이 된 지학순 주교(전 원주교구장)와 함께 월남, 50년 3월 20일 서울에서 사제품을 받았다.
『49년 당시 평양교구장이셨던 홍주교님과 신주교님께서 1주일 사이로 공산당에 의해 납치되셨어요. 서품을 목전에 두고 있었지만 주교님이 안계시니 어떻게해. 사제품을 받기 위해 하는 수 없이 서울로 왔지요』
하느님의 섭리로 수품
『건강하게 큰 과오없이 50년을 살게 해 주신 하느님께 감사하고 있다』며 소감을 말하는 윤대주교에게 50년 사제생활중에 가장 기억에 남는 일이 무엇이냐고 물었다.
『전 수원교구장이신 김남수 주교님과는 원래 같은 반이었지. 한데 김주교님은 고1과정을 마치고 월반을 했어요. 교장신부님께서 내게 그 사실을 알려주면서 너는 어떻게 하겠느냐고 묻더군. 원한다면 너도 월반할 수 있다는 말씀이었지. 그때 난 신부가 되는데 그리 급할게 없다고 생각해서 그냥 남았죠』
그러나 이 순간의 결정이 가져온 결과는 엄청났다. 한해 빨리, 그러니까 49년도에 사제품을 받은 신부를 포함해서 당시 사제들은 한명도 빠짐없이 공산당에 의해 납치돼 갔다. 만약 월반을 해서 일찍 사제품을 받았더라면…
『그 일을 생각하면 지금도 하느님을 섭리를 느껴요. 아마 그때 납치됐더라면 최근 교황청이 발표한 「20세기 신앙의 증거자」에 들어갔을테지. 하지만 하느님께선 내가 사제로 50년을 살게 해주셨으니 감사할 노릇이죠』
6·25 발발 후 부산 피난민 수용소에서 종군신부로 활동했던 시절도 윤대주교에겐 잊을 수 없는 기억이다. 『그땐 전쟁 초기여서 밀려드는 피난민들과 병자들로 발디딜 틈도 없었지. 특히 이질환자와 폐병환자들이 많았는데, 그들에게 겨우 교리를 가르치고 세례를 주고 나면 다음날 죽어나가는 경우가 허다했어요. 그때의 경험은 사제로서 짧지만 매우 감동적인 사목체험이었지요』
포로수용소 종군신부/strong>
윤대주교에겐 명동본당 보좌시절과 부산 피난민 수용소에서의 생활이 신부로서 신자들과 부닥치며 활동했던 유일한(?)시기였기에 남다른 기억으로 남아 있다.
윤대주교는 56년 9월 로마에 유학, 60년 4월 그레고리안대학에서 신학박사 학위를 받고 귀국해 천주교중앙협의회 총무 신부로 일했다. 63년 10월 7일 서울교구로부터 수원교구가 분리되면서 초대교구장에 임명됐고, 그해 10월 20일 로마에서 바오로 6세 교황으로부터 주교품을 받았다.
67년 3월부터 1년 동안 서울대교구 교구장 서리를 겸임하기도 했으며 73년 10월 25일 대주교로 승격되면서 광주대교구장에 임명돼 11월 30일 제7대 광주대교구장에 취임, 착좌한 후로 28년간 광주에서만 살고 있다.
윤대주교의 재임기간 동안 교구의 모습도 많이 변했다. 29명이던 한국인 사제가 177명으로 6배 가까이 늘었고 신자 수는 7만2천명이던 것이 27만3천명으로 불어났다. 본당도 45개에서 91개로 늘었으며 10개의 교육기관, 33개의 의료기관과 36개의 자선사업기관 단체를 사목하는 교구로 발전했다.
이 모두가 선교와 사제양성에 기울인 윤대주교의 남다른 열성의 열매이기도 하다. 윤대주교는 특히 『지난 10년간 100명의 신부를 배출한 것이 가장 기쁘고 보람을 느낀다』면서 『사제단과 교구민 모두가 합심해서 노력해준 결과』라며 교구 공동체에 공을 돌렸다.
교세·사제 증가 가장 보람
곧 20주기를 맞는 「5·18 광주민주항쟁」과 관련, 윤대주교는 『광주민주항쟁은 우리 민족이 겪은 시련이자 우리 사회의 민주의식을 한단계 성숙시키는 계기가 된 희생이었다』면서 『보상문제 등 구체적인 부분에서 아직 논의의 여지가 있지만 민주화 발전 도정에서 광주항쟁이 갖는 의미와 가치라는 큰 테두리는 제대로 각인된 것으로 생각한다』고 평가했다.
윤대주교는 그러나 국민의 정부 출범 이후 우리 사회는 IMF라는 시련을 슬기롭게 극복해낸 반면 빈익빈 부익부 현상은 더욱 심각해진 것 같다고 우려를 표하고 『무엇보다 정치인들의 구태(舊態)를 심판할 수 있는 국민들의 의식이 문제』라고 지적했다.
영적 가치 바탕돼야
교구장으로서 발표한 지난 사목교서들을 보면서 「공동체」라는 일관된 주제를 발견할 수 있었다는 윤대주교는 『교회 구성원 모두가 성삼위의 친교와 일치에 바탕을 둔 이 공동체의 정신을 제대로 이해하고 지향하도록 해야 한다』며 향후 교구 사목방향의 일단을 내비쳤다.
『구체적으로 어떻게 해야 하느냐가 문제인데, 그 답은 「영성의 우위성」에 있다고 봅니다. 현세적 가치는 내세적 가치를 지향해야 하고 하느님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인간의 전인적인 해방을 지향해야 합니다. 그것이 곧 영원한 구원이지요. 초월적 구원, 종말론적인 하느님 나라의 완성이 모든 교회 활동과 복음화의 기초가 돼야 해요』
사제생활 50년을 지켜준 보루가 있다면 무엇이냐는 물음에 윤대주교는 개인적으로 성 비안네 신부를 사제생활의 모범으로 따랐다면서 『덕원신학교 시절 신부님들, 특히 13년 동안 늘 귀감이 돼주셨던 안셀모 로멜(노) 교장 신부님의 모습과 특별한 섭리로 저를 사제가 되게 하신 하느님의 안배하심과 그 뜻을 되새기며 늘 사제로서의 생활을 반추해 왔다』고 말했다.
『사제에게 가장 중요한 덕목은 신자들에 대한 목자로서의 사랑입니다. 사제는 나를 위해서 있는 존재가 아니라 그리스도의 대리자로서 신자들을 위해 영적인 봉사를 하는 사람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겸손해야죠. 하느님의 부르심도 은총으로 가능한 일이고 사제직분을 잘 수행하는 것도 인간적인 능력이 아니라 겸손하게 하느님께 의탁함으로써 가능합니다. 사제에겐 그래서 늘 기도하는 생활이 중요합니다』
나주 성모상 문제와 관련해서 윤대주교는 『교도권의 공식 지침이 내려진 후 신자들의 발길이 줄었다는 보고가 있었다』고 말했다. 그러나 최근까지 신자들의 발길이 이어지고 있고, 인터넷에도 이에 관한 내용들이 소개되고 있는데 대해 윤대주교는 『한순간에 정리될 문제는 아니라고 본다』면서 『그러나 교구의 공식입장이 나오기까지 이미 교황청과 충분한 교감이 있었고 협의가 있었다는 사실을 신자들이 알아야 할 것』이라는 말로 교구의 입장을 거듭 확인했다.
워드프로세스 배울 계획
은퇴시기와 향후 계획에 대해 윤대주교는 『교황님께서 부교구장님과 함께 하는 시간을 많이 주려는 의도에서 지금까지 은퇴를 수락하지 않으신 것 같다』면서 』『아마도 올 여름 이전에는 되지 않을까 생각한다』고 밝혔다.
『은퇴후엔 글쎄요, 우리 최창무 대주교님이 무척 바쁘실텐데 보좌주교님이 오실때까지 보좌주교 노릇이나 하며 도와드릴 생각입니다. 또 글씨가 워낙 악필이라 워드프로세스를 배워볼까 생각중이에요』
윤대주교는 인터뷰를 마치면서 가슴 깊은 곳에 묻어두었던 이산(離散)의 아픔이 떠오른듯 『하루빨리 통일이 되었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2년전부터 미국 LA에 있는 친지를 통해 북한에 생존해 있는 가족들과 서신왕래를 하고 있다는 윤대주교는 『남북한 교류가 확대되고 통일이 될때까지 민족화해를 위한 노력에 교회와 온 민족이 힘을 모아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 주요 약력
▲1924년 11월 8일 평안남도 진남포시 용정리 출생 ▲1937년 덕원신학교 중등과 입학 ▲50년 3월 20일 사제수품, 명동보좌 ▲56년 로마유학 ▲60년 4월 그레고리안대학 신학박사, 한국천주교중앙협의회 총무 ▲63년 10월 7일 초대 수원교구장 임명, 10월 20일 주교서품 ▲67년 4월 서울대교구장 서리겸임 ▲73년 10월 25일 광주대교구장 임명, 11월 30일 취임 착좌 ▲75년 3월~81년 3월 주교회의 의장 ▲80년~84년 5월 선교 200주년 주교위원회 위원장 ▲85년 서강대학교 명예문학박사 ▲74년~현재 광주가톨릭대학교 이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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