십자가 위에서의 예수님의 고통스러운 죽음은 그분의 반대자들에게는 그가 메시아가 아니었다는 반증이었다. 그들은 예수님이 정말 메시아였다면 하느님께서 그를 결코 그렇게 비참하게 죽게 내버려두시지 않았을 것이라고 주장하였던 것이다. 사실 성서 자체에도 『나무에 매달린 사람은 하느님의 저주를 받은 자이다』(신명 21,23 참조 갈라 3,13)라는 말이 있지 않은가? 초기 그리스도 신자들은 이러한 주장들을 반박하여야 했다. 그래서 그들은 처음부터 예수님은 「당신의 죄 때문에」죽으신 것이 아니라, 『우리들의 죄들을 위하여』죽으신 것이며, 그분의 죽음은 성서말씀과 반대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성서말씀에 따라서』(1고린 15,3) 된 것이었다고 선포하였다. 이런 이유 때문에 예수님의 수난 이야기에는 예수님의 무죄하심이 강조되어 있고, 구약성서가 인용되거나 암시되는 구절들이 그렇게 많은 것이다.
예수님의 죽음을 해석하면서 구약성서에서 근거를 찾아보려는 하나의 예가 바로 오늘 복음에 나오는 십자가 위에서의 예수님의 죽음을 광야에서 높이 들려 매달렸던 구리뱀과 비교하는 것이었다. 민수 21,4~9에는 다음과 같은 옛 이야기가 전해지고 있다. 언젠가 광야에서 사람들이 불뱀에 물려 죽게 되었을 때, 하느님께서 모세의 청원기도를 들어주시면서 지시하기를 『구리뱀을 만들어 기둥에 달아 매고 그것을 쳐다보게 하라. 쳐다보는 사람은 죽지 않을 것이다』라고 지시하셨다고 하는데, 모세가 이 지시대로 하였더니, 과연 구리뱀을 쳐다 본 사람은 죽지 않았다고 한다.
이 옛날 이야기(민수 21,4~9)는 요한 복음사가에게 있어서 예수님의 십자가 위에서의 죽음에 대한 예시였다. 구리뱀의 일화는 『높이 들려 매달린』분을 믿는 사람은 영생을 얻게 될 것이라는 예시였던 것이다. 여기서 강조점은 믿음이다. 이미 구약의 구리뱀 이야기 안에서도 불뱀에 물려 죽게 되었던 사람들이 죽음을 면하게 면하게 된 것은 구리뱀을 쳐다보았다는 사실 자체 때문이라기보다는, 『구리 덩어리에 불과한 것 같은 구리뱀을 쳐다보면 살게 된다』는 전혀 믿어지지 않는 말씀에도 불구하고, 그것이 바로 모세를 통한 하느님의 뜻이라는 것을 『믿고 따랐기』때문이었다. 이런 믿음의 태도는 바로 그 앞의 대목에 나오는 불평불만으로 대들던 태도와 매우 대조를 이룬다.
오늘의 우리도 영원한 (참) 생명을 얻기 위해서는 『높이 달리신 그 분』, 곧 십자가에 달리신 주 예수님을, 믿음을 가지고 『마음을 드높이』, 『쳐다』보아야 한다.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분명한 것은 그것이 예수님의 보여주신 『십자가의 길』이 바로 『영생에 이르는 길』이라는 것을 믿는다는 것을 포함한다. 십자가는 본디 치욕과 무력함의 상징이었다. 그 십자가가 신앙인들에게 구원의 표징이 되는 것은, 예수님의 십자가상 죽음이 바로, 때로는 많은 방해와 저항을 받아가시면서까지, 사랑과 정의로 일관하셨던 그분 삶의 최종 귀결이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예수의 십자가에 관한 위의 모든 말은 그분의 「부활에 관한 신앙」을 전제하고 있다. 그분이 십자가에 매달려 돌아가신 분으로 끝났다면, 『십자가에 달린 분을 믿는다는 것』은 어리석음의 극치일 뿐이다.
오늘 복음의 말씀은 오해의 여지없이 하느님께서 당신 외아들을 보내시어 십자가 위에서 돌아가시도록 허용하신 이유가 인류에 대한 당신의 극진한 사랑 때문이었다는 것을 다음과 같이 선언하고 있다 : 『하느님은 이 세상을 극진히 사랑하셔서 외아들을 보내 주시어 그를 맏는 사람은 누구든지 멸망하지 않고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해 주셨다』(요한 3,16 참조: 로마8,32).
예수님의 십자가는 한편으로는 오늘 복음의 말씀처럼 하느님의 사랑이 얼마나 크신지를 일깨워 주면서 그분께 대한 믿음과 희망 그리고 사랑을 더욱 굳세게 가지라고 요청한다. 다른 한편으로 예수님의 십자가는 우리에게 「세상의 죄와 고통」에 대하여 더욱 예민해지게 만든다. 그래서 개인적으로 뿐 아니라 단체적으로도 지은 죄를 반성하고 회개하도록 자극하며, 더 나아가 죄에 물든 우리 사회의 구조도 개선해 나가도록 요청한다. 남이야 고통을 당하든 말든 상관없이 자기가 현재 누리고 있는 「편안함」만을 생각하며 거기서 조금도 방해받지 않고 살아가려는 태도는 결코 예수님을 믿고 따르는 길이 아니다. 그리스도 신자라고 하면서 다른 사람들의 고통 앞에서 그렇게 팔짱끼고 있는 식으로 살아가는 것은 그리스도를 욕되게 하는 행위이다.
오늘 복음에서 하느님의 심판은 인간이 자신의 불신앙을 고집함으로써 자기에게 주어질 수 있는 구원에서 멀어지는 행위자체에 있는 것으로 해석되고 있다. 불신앙을 고집하는 이런 사람들을 오늘 복음은 『자기들의 행실이 악하여 빛보다 어둠을 더 사랑』(요한 3,19)하는 사람들이라고 표현하고 있는데, 이런 말씀은 오늘의 우리의 삶을 반성하게 한다. 우리는 어떻게 살아가고 있는가? 자신의 죄스러운 실상이 드러날까 두려워 일부러 환하고 따뜻한 빛을 피하고 있는 형편은 아닌가? 사실, 이기심 속에 살아가는 사람들은 하느님께 문을 닫아걸고, 그 하느님 사랑의 환하고 따뜻한 빛을 피하여 일부러 어둡고 추운 골방 속에 갇혀 사는 것이나 마찬가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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